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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7대 왕 순종( 1874~1926)과 비 순명황후 민씨, 계비 순정황후 윤씨 세 사람을 합장한 무덤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과 함께 1970526일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다.순명효황후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광무 8) 115일 숨졌고, 이듬해 14일 양주 용마산 아래 언덕에 예장되었다. 1926425일 순종이 세상을 떠나 그해 611일 홍릉 왼쪽 산줄기 현 위치에 안장되면서 순명효황후를 이장하여 합장하였고, 1966년에는 순정효황후가 합장되었다.조선시대의 마지막 왕릉인 유릉()은 조선왕릉 중에서 하나의 봉분에 세 명을 합장한 유일한 동봉삼실릉()이다. 홍릉처럼 황체릉 양식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약간 작은 편이다. 봉분을 감싼 병풍석과 난간석에는 꽃무늬가 새겨졌으며 혼유석 망주석·사각.장명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대부분의 조선 왕릉에 설치된 석양()과 석호() 없다.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에는 정자각 대신 침전(殿)이 있고, 침전 앞 참도() 양쪽에 문인석·무인석과 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 등 동물 석상이 차례로 배치되었다. 침전 외에 비각.홍살문 수복방.재실 등의 부속건축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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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6대 왕 고종( 1852~1919)과 비 명성왕후 민씨(1851~1895)를 합장한 무덤이다. 순종과 순명황후,순정효황후의 무덤인 유릉()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다.1895년 8월 20일 경복궁 곤녕전에서 시해된 명성황후는 1897년 11월 21일 서울 청량리에 묻혔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숨져 3월 4일 현 위치에 예장되었고, 그때 명성황후의 능이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이장되어 고종의 능에 합장되었다.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홍릉은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성되었다. 꽃무늬를 새긴 12면의 병풍석으로 봉분을 둘렀으며, 봉분 밖으로 역시 꽃무늬를 새긴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혼유선,망주석,사각 장명등의 석물을 배치하였고, 봉분 밖으로 3면의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대부분의 조선 왕릉에 설치한 석양()과 석호()는 없다.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는 정자각 대신 정면 5칸·측면 4칸의 일자형 침전(殿)을 세웠다. 침전 앞의 참도() 양 옆으로 문인석·무인석과 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의 동물 석상을 차례로 배치하였으며, 장대한 크기의 문·무인석은 금관을 쓴 전통적 기법으로 조각되었다. 침전 외 부속건축물로 비각, 홍살문 수복방·재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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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3대 순조대왕(재위 1800∼1834)과 순원왕후 김씨(1789∼1857)의 무덤이다. 순조는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서 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에게 정치를 돌보게 됨으로써 외척에 의한 정치가 극에 달하였고, 사회가 혼란했다. 인릉은 무덤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고,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양석과 마석·상석·망주석을 세웠다. 문인석·무인석의 조각은 사실주의적으로 섬세하고 아름답다. 언덕 아래에는 2개의 비석을 세웠다. 순조는 18341113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숨을 거뒀다. 1835(헌종 1) 419일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인조 무덤장릉() 왼쪽 산줄기에 예장하였다가 풍수가 좋지 않다 하여 1856(철종 7) 1011일 현 위치로 옮겼다. 순원왕후는 185784일 창덕궁 양심각에서 숨져 그해 1217일 인조와 합장되었다 원래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재실은 무덤과 같은 지역에 있는데 헌릉·인릉의 재실은 서로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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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3대 왕 태종( 1367~1422, 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 민씨(1365∼1420)의 무덤으로, 인릉(;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무덤)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 194호로 지정되었다.1420년(세종 2) 7월 10일 창경궁 별전에서 원경왕후가 세상을 뜨자 태종의 명으로 같은 해 9월 17일 대모산 기슭에 왕후의 능을 조성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42년(세종 4) 태종이 승하하자 그해 9월 6일 세종이 어머니 원경왕후의 능 옆에 태종의 능을 조성하였다.헌릉은 두 개의 능이 같은 언덕에 조성된 쌍릉으로, 조선 태조의 건원릉 형식을 따랐다. 두 능은 12칸의 난간석을 둘러 서로 연결되어 있다. 봉분의 아랫부분은 병풍석이 감싸고, 능 앞의 석물은 망주석.혼유석.장명등 각 1쌍, 석호()·석양() 각 4쌍, 문인석.무인석·석마() 각 2쌍이 배치되었다. 이는 고려 공민왕릉(현릉)을 기본으로 삼은 배치법으로 , 조선왕릉의 위엄과 웅장함을 잘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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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1대 왕 영조(, 재위 1724~1776)의 맏아들로 사후 왕으로 추존된 진종( 1719~1728)과 부인 효순왕후 조씨의 무덤이다 3개의 조선왕릉(공릉·순릉·영릉)으로 이루어진 파주삼릉 (, 사적 제205)에 속해 있다.1728년(영조 4) 11월 16일 10살의 나이로 창경궁 진수당에서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의 무덤은 ‘효장묘’라 하였는데 1776년(정조 즉위) 왕(진종)으로 추존되면서 무덤도 영릉()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병풍석과 난간석은 설치되지 않았다. 각 봉분 앞에 상석 1좌씩 놓았고, 그 양측에 망주석 1쌍을 세웠으며, 봉분 주위에 석호()·석양() 각 2쌍을 교대로 배치하였다.봉분 아랫단에는 문인석,석마() 각 1쌍과 사각옥개형 장명석을 설치하였고, 무인석은 세우지 않았다. 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 정자각.비각.홍살문이 있다. 왕과 왕후로 추존되기 전 세자와 세자빈 무덤으로 조성되었을 때 설치한 모습 그대로이며, 추존 후에도 별도의 가설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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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 9대 왕 성종( 재위 1469∼1494)의 원비인 공혜왕후 한씨(1456∼1474)의 무덤이다.  공릉·순릉·영릉으로 이루어진 파주삼릉(, 사적 제205호) 경내에 있다. 공혜왕후는 1474년(성종 5) 4월 15일 왕비로 봉해진 지 5년 만에 창덕궁 구현전에서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6월 7일 현 위치에 안장되었다.봉분을 감싸고 있는 12칸의 난간석은 태조의 건원릉(), 태종의 헌릉() 난간석을 본떠 만든 것이다. 난간석 밖으로는 석양()과 석호() 각 2쌍이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봉분 앞으로 상석이 있고, 상석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있으며, 봉분 뒤쪽으로는 곡장(; 나지막한 담)이 설치되었다.봉분 아랫단에는 문인석 1쌍과 석마() 1쌍이 마주보고 서 있고, 중앙에 팔각 장명등이 있다. 가장 아랫단에는 무인석 1쌍과 석마 1쌍이 마주 서 있으며, 능원 아래에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이 있다. 비각에 보호된 비석은 1817년(순조 17) 9월 세운 것으로, 전면에 ‘조선국공혜왕후순릉’이라 새겨졌다.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을 뿐 조선 초기의 능제()와 비슷한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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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8대 왕 예종( 1450~1469, 재위 1468∼1469)의 원비 장순왕후() 한씨(1445~1461)의 무덤이다. 공릉·순릉·영릉으로 이루어진 파주삼릉(, 사적 제205호) 경내에 있다.장순왕후는 1461년(세조 7) 12월 5일 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고, 1472년(성종 3) 왕후로 추존되었다. 세자빈으로 세상을 떠나 세자빈 묘로 단출하게 조성되었으며, 왕후로 추존된 이후에도 더 이상의 정비는 하지 않았다.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고, 망주석 또한 생략되었다. 커다란 봉분을 석양()과 석호()가 좌우에서 호위하고 있으며, 혼유석,장명등,문인석,석마()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 바깥쪽으로는 곡장(; 나지막한 담장)이 설치되었다.능 아래쪽의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길을 참도()라 하는데 길이 ‘ㄱ’자로 꺾여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참도는 원래 직선으로 만들지만 지형조건 때문에  중간지역에서  꺾이게 되었는데 조선왕릉 중 참도가 꺾인 곳은 공릉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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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1대 왕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의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 윤 씨의 무덤이다.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무덤인 강릉()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201호로 지정되었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중종 옆에 묻힐 요량으로 장경왕후의 능 옆에 있었던 중종의 정릉()을 풍수지리가 안좋다 하여 선릉옆으로 옮겼다. 하지만 새로 옮긴 정릉의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나자 결국 그 자리에 묻히지 못하고 현재의 위치에 예장되어 중종 옆에 묻히려던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태릉은 왕비의 단릉(單陵)이라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한 능으로,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한다. 봉분을 감싼 12면 병풍석에는 12 지신상과 구름 문양을 새겼고, 병풍석 위의 만석(滿石) 중앙에 12간지를 문자로 새겼다. 봉분 바깥쪽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봉분 앞에 상석과 망주석 1쌍을 세웠다. 봉분 주위로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을 교대로 배치시켰으며, 뒤쪽으로는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을 쌓았다. 봉분 아랫단에 문인석과 석마(石馬) 각 1쌍, 팔각 장명 등이 있고, 가장 아랫단에 무인석과 석마 각 1쌍이 있다. 능원 밑에는 정자각·비각·수직 방(守直房)·홍살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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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은 단릉으로 조성된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이다. 처음에는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역이 조영되었으나, 태조가 승하한 후, 원비의 태생인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덕왕후는 평민으로 강등되고, 현재의 위치로 천장되었다. 따라서 왕릉제인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봉분에서 사라지고, 4각 장명등, 고석, 상석 등만이 원래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장명등은 고려시대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 능역의 가장 오래된 석물인 동시에 예술적 가치가 높다.정릉의 공간은 일반 왕릉의 영역이 직선축을 이루는 데 비해, 자연 지형에 맞추어 절선축으로 조성되어 있다. 능역 입구 금천교의 모습은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조형기술을 볼 수 있으며 재실터 양 옆으로 서 있는 느티나무의 보호수도 살펴 볼만한 가치 있는 역사경관이다

역사탐방

극진히 사랑했던 현비가 갑자기 승하하자 태조는 도성 안인 현 덕수궁 뒤편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능역을 조성하고 강씨 봉분 우측에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마련하여 능호를 정릉으로 정하였다. 아울러 능의 동편에 흥천사(興天寺)라는 절을 지어 재궁으로 삼고 능침사찰로 하였다.그러나 잘 조성된 정릉은 신덕왕후의  왕자인  방번과 방석이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살해되고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의  다섯 번째 소생인 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 태종은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정하여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는 것을 허락하고,청계천 광통교(현재의 광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쓰게 하도록 하였다.  정릉이 있던 이 일대는 지금까지 정동(貞洞)으로 불리고 있다. 그로부터 260여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 신덕왕후는 현종에 의해 복권되면서 그 능이 현재와 같이 재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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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7대 왕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와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1418∼1483)의 무덤이다.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7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왕릉 최초로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을 취하였고, 두 능의 중간지역에 하나의 정자각(丁字閣)을 세웠다.세조의 유언에 따라 봉분 내부 돌방을 만들지 않고 회격(灰隔;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으로 처리하였다.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이전에 병풍석에 새겼던 12지신상은 난간석에 새겼다. 또 능역 아래쪽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길인 참도(參道)가 생략되어 있다.이렇게 간소하게 능을 조성함으로써 부역인원과 조성비용을 감축하였는데 이는 조선 초기 능제(陵制)에 변혁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고, 이런 상설제도는 이후의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능 주위에는 문인석·무인석·상석·망주석·석호(石虎)·석양(石羊)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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