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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원

사적 제200호인 서삼릉(西)안 서삼릉 정문에서 왼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현재 중앙여고 자리)에 있었으나 1949년 지금의 장소로 이장하였다. 봉분 주변에 장명등과 여러 석물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묘비의 비문은 영조가 직접 쓴 친필이다. 의소세손(1750~1752)은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듬해인 1751년 왕세손에 책봉되었으나 3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였다. 

효창원

조선 22대 왕 정조와 의빈 성씨()의 소생인  문효세자(, 1782~1786)는 5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원래 문효세자의 무덤은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효창공원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44년에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찾아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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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묘

서삼릉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 효릉뿐 아니고 회묘. 태실. 소경원. 왕자. 공주묘. 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다. 그중 회묘는 성종의 첫번째 계비지만 조선 최초로 후궁 출신 왕후가 된 여인이며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인수대비와 후궁들에게 미움을 사 결국 사약까지 받게된 인물이다.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40기중 하나는 아니지만 회묘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비공개지역이므로 소개합니다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의 서삼릉 경내에 있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1969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대학의료원 자리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한 것이다.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회릉으로 추숭하였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회묘로 강봉되고 신주는 묘 곁에 묻혔으며, 석물은 봉분과 함께 남아 있다가 서삼릉 내의 귀인()숙의()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기구한 삶을 살다간 폐비윤씨. 성종의 첫번째 계비지만 조선 최초로 후궁 출신 왕후가 된 여인이다.  [출처] 네이버 폐비윤씨의 수난 

일단 그녀의 나이 또한 유명한데 정확히 알려지진 않았으나 주변인물들로 유추해보면 성종보다 무려 12살이나 연상이다 .성종은 조선 역사상 최고로 많은 비와 많은 후궁을 둔 왕이다. 정치는 잘했으나 여색을 밝히는 왕이었으니 나이 많은 윤씨의 눈엔 질투심이 없다 하더라도 여자의 입장 그것도 중전의 입장에선 못마땅했을 것이다.윤씨는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무명을 짜서 직접 시장에 내다 팔아 어머니를 봉양할 정도로 가난한 사대부집이었다고 한다.그런 출신이 공신들이 판치던 세상에 원자를 회임했다고 낙하산급 인사가 단행됐으니 가만 있을 후궁들이 아니었다. 후궁들의 왕따 작전이 시작된다.내훈이란 책까지 편찬한 유교적 사상에 꽂혀 있는 인수대비가 시어머니다. 성종 역시 인수대비의 엄격함에 기를 못 펴고 살았다고 하는데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윤씨가 걸어야 할 길이 결코 녹록치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미천한 가문 출신의 윤씨를 인수대비는 가례 전부터 반대했었으니 고부간의 갈등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고 가문이 볼품없단 이유로 중전 자리에 대 놓고 도전하는 후궁들이 많았다.가장 중요한 건 윤씨의 투기인데 투기가 진짜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많은 기록에서 투기와 질투를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

그래서 중전에 앉은지 얼마안되어 후궁들의 모함이 본격 시작된다. 당시 품계로 그 유명한 엄숙의 정숙의가 중전의 투기를 이유로 대비전과 주상에게 계속 모함을 했고 심지어 곶감에 비상을 탔다는 등의 중상모략이 끊이질 않았다.  내명부의 훈계로 엄한 인수대비가 교태전에 직접 찾아가 투기와 예의가 없다는 이유로 회초리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당시 중전이었던 윤씨는 안팎으로 모진 수모를 당했다 .

기묘록에는 성종이 내시를 시켜 윤씨를 감시하게 했는데 대비가 이를 알고 내시에게 사주해 사실을 조작해 보고하게 끔 시켰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윤씨가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냈다고 하는데 성종실록엔 윤씨가 오히려 후궁방에 뛰어 들어 성종에게 뺨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어찌됐건 두 기록 모두 윤씨의 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성종의 품에서 멀어져 갔고 이미 성종의 눈 밖에 난 것은 물론 당시 삼전(정희왕후, 인수대비, 안순왕후)도 윤씨를 탐탁치 않게 여겼고 조정을 주름잡는 공신들의 눈밖에도 난 상태였다.그러기에 끝내 윤씨를 중전의 자리에서 폐위 하기에 이른다.

폐위후 폐비 윤씨는 사가에서 힘들게 살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를 염탐하던 조정에서도 원자의 생모인 만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공론이 제기됐으나 다시 한 번 인수대비와 후궁들이 공모해 성종에게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복위는 커녕 그녀를 사사하기에 이른다 .사사 전 원자(연산군)를 의식해 대비전은 주저했으나 아들이 왕위 되기 전 후환을 없애야 한다며 삼전합의를 이끌어 낸 한명회 정창손 등이 가세해 성종을 압박했고 성종 역시 직접 나서  폐비 문제에 종지부를 찍는다 . 성종 재위 10년 윤씨를 서인으로 폐하고 것도 모자라 좌승지 이세좌에게 사약을 내려 마을주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녀를 사사한다.

기묘록에 따르면 윤씨는 피눈물을 닦아 피로 얼룩진 수건을 어머니 신씨에게 전하면서 내 아이가 보위에 오르거든 나의 슬프고 원통한 사연을 알려 주오.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주시오. 라고 지금의 건원릉 옆에 안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렇게 폐비 윤씨는 사사되었고 그녀의 묘 또한 천장과 이장을 반복하다 끝내 이자리에 모셔졌다 .연산군 일기 1496년 3월 13일자엔 무덤을 발견한 연산은 묘가 허물어지고 구멍이 뚫려 여우와 살쾡이들이 시신을 먹어치웠을 것 같구나, 어찌 이리 무심할 수 있는가' 라고 애석함과 분통을 토로한 기록이 있는데 당시 묘의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회묘를 천장할 때 지관은 없었나 보다..... 단지 마땅히 이장할 자리가 없어 후궁묘역 좌측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능침공간은 그럴듯 하게 조성되었지만 무엇보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볕도 잘 들어오지 않아  매우 음산한 기운이 감돌아 음기가 강하다. 생전에도 편한 삶을 살지 못했고 천수도 누리지 못하고 사사된 것도 모자라 죽어서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우여곡절 끝에 자리를 잡았어도 편히 쉴 수 없으니 이보다 더 기구한 운명이 어디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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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후 태를 봉안하는 곳

왕실에서는 왕세자를 비롯하여 왕자, 세손, 궁주, 옹주가 태어나면 태(胎)를 석실(石室)에 담아 전국 길지(吉地)를 가려 봉안(奉安)하고 태봉(胎峰)이라 해 그 주변에서는 방목. 벌채. 개간을 금하였다. 태실 역시 집중관리라는 미명하에 태조의 태실 등 22기와 왕자 등 32기의 태실을 1930년대를  후하여 서삼릉 경역내로 이설했다. 일제강점기에 전국각지에 산해되어 있는 태실을 집중관리한다는 미명아래  국운을 쇄락시키고 민족정기를 말살시키려는 의도로 옮겨진 곳이다.서삼릉 경역내 묘 및 태실의 집장은 능역 일원을 공동묘역으로 변형케 해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비하 훼손하고자 한 일제의 의도적 책략이었다.

비석의 뒷면에는 태가 있던 곳의 위치와 날짜가 적혀있었는데 일본연호를 삭제한 흔적이 있다.

태실 (비공개지역) 

아름다운 길 서삼릉입구에 도착하니 비공개지역 효릉을 답사를 신청한 학생들과 관람객이 있었다.

서삼릉 안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 효릉뿐 아니고 회묘. 태실,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았다.

그 중 태실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아니지만  태실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서삼릉 내의 비공개지역이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종대왕의 태도 묻혀 있네요 ~

찾아가는법

전철 삼송역 5번출구로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041번 마을버스를 타고 10여분을 달려 삼송동 허브나라에서 내려 길건너 서삼릉 안내판 방향으로 약 15분 쉬엄쉬엄 걸어가면 원당목장 경마교육원옆에 서삼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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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공주묘

서삼릉에 묻힌 망자의 숫자로 최대다. 서삼릉 내에 후궁, 왕자, 공주의 묘 46기가 있다. 이중 희묘(禧墓)와 경선군묘(慶善君墓) 이외의 묘는 후궁과 왕자공주묘로 구분돼 집장(集葬)돼 있다. 가로 세로 반듯하게 정렬한 무덤군이 보기에 참 민망하다. 왕릉 경역내에는 후궁.왕자.공주의 묘를 쓸 수 없음에도 서삼릉에는 이렇게 많은 묘가 있다니 아이러니하지만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고 합니다. 경술국치로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 11월 일본은 왕릉의 품격을 비하하고 훼손키 위해 궁내성 소속으로 망조왕실(亡組王室)을 관리하기 위해 이왕직(李王職)이 설치됐다. 이왕직에서는 서울, 경기 일원에 산재한 후궁, 왕자,공주등의 분묘를 집장관리한다는 명목아래 서삼릉 경역내 집장지가 선정됐다. 일제때 숙종의 후궁인 소의 유씨의 묘외 15기와 세종대왕의 1녀 정소공주묘외 18기를 천묘 집장했다

8 ·15 광복 후에는 일제 때 옮기지 못한 후궁묘 중 묘역 주변 개발로 인해 존치가 어렵게 된 명종 후궁 경빈이씨묘 외 6기를 천묘했다.왕자묘로서는 고종의 1남 완화군묘를 천묘했다. 아직 서울 경기 일원에 묻혀 있는 일부와 서삼릉의 46기가 전부다. 이렇게 서삼릉 경역내 집장은 능역 일원을 공동묘역으로 변형시켜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비하 훼손한 일제의 의도적 책략이었다.

왕자.공주묘 (비공개지역)

아름다운 길 서삼릉입구에 도착하니 비공개지역 효릉을 답사하고자 하는 몇 몇의 학생들과 관람객들이 있었다. 서삼릉 안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 효릉뿐 아니고 회묘. 태실,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았다. 그 중 후궁묘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아니지만 왕자.공주묘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서삼릉 내의 비공개지역이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릉만 후다닥 답사하면 될 줄 알았지만 효릉이 희릉.예릉과 함께 붙어 있는 게 아니라 빠른 걸음으로 10여분을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고 가는 길에 소경원 왕자공주묘,후궁묘,회묘,태실등 많은 비공개지역을 함께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찾아가는법

전철 삼송역 5번출구로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041번 마을버스를 타고 - 약 10여분을 달려 삼송동 허브나라에서 내려 - 길건너 서삼릉 안내판 방향으로 약 15분 쉬엄쉬엄 걸어가면 원당목장 경마교육원옆에 서삼릉이 있다.          

여기서 잠깐 !  공주라는 말은 ?

주는 중국 진 · 한나라 때 비롯된 말이라고 하나,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이전부터 공주라는 말을 사용했다. 낙랑공주와 고구려의 온달에게 시집간 평강공주가 있으며 <삼국유사> 서동요의 주인공 선화공주도 있다. 제도적으로 공주라는 호칭은 고려 문종 때의 관제에 따르면 대장공주와 함께 정1품이었다. 그 뒤 공양왕 때 도평의사사의 건의에 따라 왕의 딸은 공주라고 불렸으나 조선 초기까지도 제도가 미비해 왕녀·궁주. 옹주 등 여러 가지로 불려 왕의 적설녀 외에 왕의 후궁도 공주라 칭했다. 그 후 조선에서는 왕의 정실이 낳은 딸을 '공주'라고 하고, 후궁이 낳은 딸을 '옹주'라고 해 구별했다. 공주는 지극히 존귀한 신분으로서 품계를 초월한 외명부다.

공주가  혼인하게 되면  모든 절차와 준비는  종부시(宗簿侍)에서  주관해 국법에 따라 예로써 치렀다. 공주의 남편은 종1품의 위(尉)인 광덕대부 숭덕대부로 의빈(儀賓)에 봉작됐으며 그에 준한 녹봉을 받았다.  의빈이 죽은 뒤에도 공주는 계속 쌀·콩·보리를 봄과 가을에 받았다. 공주가 낳은 아들은 처음 종7품, 사위는 2등급 낮은 종8품의 품계를 받고 그에 준한 대우를 받았다. 공주는 내명부 · 외명부와 함께 궁중의 잔치, 왕비의 시위 혼인 및 초상 등 여러 행사에 참석했다.  공주가 죽으면 국가에서는 왕녀의 상장제도에 따라 염빈. 예장. 조묘의 3도감을 설치하고 3일간 조회를 열지 않으며, 왕 이하 궁인들은 고기를 먹지 않는 등 정중한 예우를 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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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원 (비공개지역) 

아름다운 길 서삼릉입구에 도착하니 비공개지역 효릉을 답사하고자 하는 몇 몇의 학생들과 관람객들이 있었다. 서삼릉 안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효릉뿐만 아니고 태실,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았다.그중 소경원은 청나라를 신봉한다고 하여 서인세력들에게 배척당하고 인조에 의해 독살된  비운의 왕자 소현세자의 묘라고 합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릉 40기중 하나는 아니지만 소경원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서삼릉 내의 비공개지역이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가슴 아픈 이름 소현세자 

이름은 왕(). 인조의 장자, 효종의 형이며,어머니는 한준겸의 딸 인열왕후다. 1625년 세자로 책봉되었고, 부인은 강석기의 딸인 민회빈강씨이고 보통 강빈이라고 부른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한후,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후 9년간 심양()의 세자관에 머물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동시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서  창구역할을  맡아 조선인 포로의 송환문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군량·선박 요구,각종 물화의 무역 요구등 정치·경제적 현안을 맡아 처리하였다. 또 청나라 인사들이 벌인 행사에 참여하고 청나라 황제의 사냥 등에도 동행하였다.
1640~1642년 인조의 병문안을 위해 잠시 귀국하였고,1644년 청나라 도르곤의 원정군을 따라 베이징에 들어갔다. 베이징에서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그로부터 서양 역법과 여러 가지 과학에 관련된 지식을 전수받고 천주교에 관해 소개받았다.

당시 베이징에서 명나라 멸망의 현실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인지 그는 청나라의 현실을 인정하고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원활히 하려고 애썼다. 이에 청나라의 경제적 요구를 들어주며 환심을 얻었는데,그들은 그를 ‘소군()’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세자관으로 들어가는 조선 정부의 재정부담이 커졌고, 동시에 부왕 인조의 의구심을 사게 되었다. 인조는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즉위시키고 자신을 몰아내려는 공작을 펴는 것으로 의심하고, 그를 감시하였다.소현세자는 베이징에 머문지 두어달이 지난 1644년 11월 26일 볼모에서 풀려났으며 1645년 2월 18일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그의 나이 34세였다  

소현세자 죽음은 일본의 개항보다 200년이나 앞설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잡혀갔던 동생 봉림대군에 비해 청나라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했고 새로운 문물에도 적극적이었다. 또한 조선에서 신봉하였던 성리학이 이미 낡은 사상이라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조에게는 청나라와 가까운 인물로 인식되었고 서인 세력들에게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결국 청나라에서의 행실을 문제삼아 인조의 냉대를 받았고 급기야 병을 얻어 급사하였다. 하지만 기록과 달리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설이 정설이다.  당시 조선의 정계에서 청나라를 배척하는 분위기와 인조의 불안을 염두에 두면 충분히 가능성 있으며 인조가 후궁 조씨와 김자점에게 시켜 소현세자를 독살한 것은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 진다. 인조실록에  의하면 소현세자의 주검은 까맣게 변해 있었고 7군데 혈에서 출혈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보통 사약을 마시고 사망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또한 세자가 사망하면 치료를 맡은 어의가 문책을 받게 되는데 인조는 오히려 그를 두둔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두 아들에 대한 인조의 평가는 극명하게 달랐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있던 동안의 고초를 인조에게 고하는데 봉림대군은 청 세조를 멸시했고 볼모로 잡혀간 조선인을 데리고 왔다고 고했다.하지만 소현세자는 청 세조는 도량이 넓은 군주이며 새로운 문물을 내보이며 그가 아끼던 벼루를 얻어 왔다고 고했다. 이에 인조는 그 벼루를 소현세자 얼굴에 집어 던졌다고도 전해진다.
소현세자가 죽은뒤 인조는 왕권강화 차원에서 세손(소현세자의 장자)을 폐위하고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책봉하였다.인조는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에게도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 역시 임금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씌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효종 때 두 아들은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효종은 살아남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을 석방하자고 건의하는 황해감사 김홍욱때려죽였다고 전한다. 이후 숙종 때 강빈의 옥사를 억울하게 여기고 소현세자와 함께 복위되었다. 19세기 말에는 그의 후손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일본의 개항보다 2백년이 앞선 것으로 조선이 세계정세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라는 평가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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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묘

서삼릉에 묻힌 망자의 숫자로는 최대다. 후궁묘 외에도, 왕자, 공주의 묘 46기가 있다.  묘는 후궁과 왕자 ·공주묘로 구분돼 집장돼 있다. 가로 세로 반듯하게 정렬한 무덤군이 보기에 참 민망하다. 왕릉 경역내에는 후궁.왕자.공주의 묘를 쓸 수 없음에도 이렇게 많은 묘가 있다니 아이러니하지만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경술국치로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 11월 일본은 왕릉의 품격을 비하하고 훼손하기 위해 궁내성 소속으로 망조왕실을 관리하기 위해 이왕직(李王職)이 설치됐다.  이욍직에는 서울, 경기 일원에 산재한 후궁, 왕자, 공주 등의 분묘를 집장관리(集葬管理)한다는 명목아래 서삼릉 경역내 집장지가 선정됐다 .일제 때 숙종의 후궁인 소의 유씨의 묘 외 15기와 세종대왕의 1녀 정소공주묘 외 18기를 천묘 집장했다.8 ·15 광복 후에는 일제 때 옮기지 못한 후궁묘 중 묘역 주변 개발로 인해 존치가 어렵게 된 명종 후궁 경빈이씨묘 외 6기를 천묘했다 한다 .  

후궁묘 (비공개지역)

아름다운 길 서삼릉입구에 도착하니 비공개지역 효릉을 답사하고자 하는 몇 몇의 학생들과 관람객들이 있었다. 서삼릉 안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 효릉뿐 아니고 회묘. 태실,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았다. 그 중 후궁묘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아니지만 후궁묘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서삼릉 내의 비공개지역이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후궁은 참으로 슬픈 운명

후궁은 <간택후궁>과 <승은후궁>으로 구분된다. <간택후궁>의 경우 애당초 간택대상이 양반 사대부 가문이므로, 그 친정의 신분이 문제될 게 없다. 문제는 <승은후궁>의 경우다.  조선시대 궁녀들의 출신성분은 대다수가 천민 공노비였다. <승은궁녀>가 종4품 숙원 이상의 내명부 내관(후궁)에 오를 수 있는 기준은 바로 임신과 출산이다. 비록 후궁의 몸을 발어 태어났지만 왕비의 자녀라는 개념으로 후궁소생의 자녀를 다뤘고 후궁은 자신의 소생에게 존댓말과 함께 '어머니'의  호칭을 들을 수도 없고 들어서도 안 되는 신분이었다. 왕이 죽으면 왕비는 궁궐에 살 수 있지만 후궁은 궁 밖으로 나가서 살아야 한다. 승은을 입었지만 자식이 없으면 후궁의 첩지는 못받고 상궁이 된다.이런 상궁들은 왕이 죽으면 궐 밖으로 나가 비구니가 됐다고 합니다.이름도 한 번 못부르고 어머니라는 말도 못듣는 후궁들 정말 불쌍하고 가엾습니다...ㅠㅠ

만 후다닥 답사하면 될 줄 알았지만 효릉이 희릉.예릉과 함께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빠른걸음으로 10여분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고 가는 길에 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회묘,태실등 많은 비공개지역을 함께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찾아가는법  

전철 삼송역 5번출구로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041번 마을버스를 타고 - 10여분을 달려 삼송동 허브나라에서 내려 - 길건너 서삼릉

안내판 방향으로 약15분 쉬엄쉬엄 걸어가면 원당목장 경마교육원옆에 서삼릉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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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16대 임금인 인조(仁祖)와 그 왕비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의 합장능(陵)으로 당초 문산읍 운천리 대덕골에 있었으나 1731년(영조7년) 석물 틈에 뱀들이 집을 짓고 극성을 부려 지금의 위치로 옮겨 합장하였다. 인조는 선조(宣祖)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추존元宗)의 맏아들로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졌는데 1623년(광해군15년) 인조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27년의 재위기간 동안에 많은 일이 있었는데 이괄의 난(李适의 亂), 정묘호란(丁卯胡亂),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은 후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고 소현(昭顯), 봉림(鳳林) 두 아들을 인질로 보내는 치욕을 당하였다. 특히 정치적으로 당파간의 싸움이 격화되어 사회가 혼란스러워짐에 따라 대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결국 1649년(인조27년)에 승하하였다. 인열왕후 한씨는 1610년 혼인하여 효종(孝宗)과 소현세자(昭顯世子), 인평대군(麟坪大君), 용성대군(龍城大君)의 4형제를 낳았으며 42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현재 장릉은 문화재 훼손방지를 위해 일반인에게 비공개 관리되고 있다

얼마전 재난지역으로 지정될 만큼  강원도 일대 고성,속초,강릉,인제 산불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많은 이재민들이 발생하였는데 ...ㅠㅠ 정말 산불조심해야 합니다.우리의 자랑스러운 소방관님들 열심히 문화재지킴을 위한 소방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방관님들 화이팅 !!

조선왕릉 40기 답사 완료 !! 

오랫동안 기다려온 비공개 지역 4곳을 (장릉,온릉,강릉,효릉) 휴가까지 받아서 다녀왔다. 신록이 푸르른 봄날 또는 단풍이 아름답게 핀 가을에 왔으면 환상적이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다. 그래도 비공개지역을 답사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뿌듯하다.

비공개 지역이므로 우선 ....장릉은 파주 삼릉관리소에서 관리하므로 파주삼릉관리소(031.941-4208)전화하셔서 답사하고 싶다 말씀하심 양식서류를 메일로 보내줄 것입니다. 그러면 <공개제한지역 출입허가 신청서>를 보내줍니다. 다운받으셔서 작성해야 하는데 학술목적 및 연구 목적으로만 허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간절한 소망을 담아 답사일과 답사 목적을 적어 팩스(031.946-0425)로 보내시면 며칠후 공개제한지역 출입 허가서를 보내줄 것입니다. 

 찾아가는 방법 

제가 다녀온 방법대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전철을타고 서울역 하차 - 경의선을 타고 금촌역에서 내려 - 건너편에서 900번 버스타고 금촌사우나에서 내리면 건너편에 장릉 현판이 보입니다. 약 15분정도 걸어가면 정문이 있습니다. 약속시간에 도착하셔서 파주삼릉관리소에 전화를 걸어 문열어 달라 하세요. 그럼 관리인이 나올 겁니다.... Good Lu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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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3대 왕 명종(재위 1545∼1567)과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다. 명종은 조선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로 1534(중종 29)에 태어났으며 1545(인종 1)에 왕위에 올랐는데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8년 동안 수렴청정하였고 1567년 경복궁 양심당에서 죽었다. 왕비 인순왕후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32(중종 27)에 태어나 1545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575(선조 8)창경궁 통명전에서 죽었다명종이 34세로 죽자 이곳을 능지로 삼아 치장하였으며, 능 관리를 위한 관원으로  .참봉 각 1명을 두었다.인순왕후 사후 왕비의 능도 왕의 능과 함께 나란히 앉혀 쌍릉을 이루었다.능제는 국조오례의식에 따랐고 왕릉과 왕비릉에 모두 구름무늬와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12면병풍석두르고 만석 중간에 12지를 새겨넣었다.또한 12칸의 난간석과 상석1,망주석1,양석 2,호석 2쌍과 3면의 곡장이 있다.한 단 아래에 문인석 1, 마석 1쌍과 가운데 명등석이 있고, 그 아래에는 무인석 1, 마석 1쌍이 있다.무덤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고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1호선 석계역에서 내려 버스1156번을 타고 버스정류장 태강릉 앞에 내렸더니 건너편에 태릉이 있었다.

매표소에서 비공개지역 예약하고 왔다 했더니만 이곳이 아니란다. ~

그럼 진작 예약할때 얘기해주지....다시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더 가 삼육대학에서 내림 삼육대학 정문 옆에 있다.

담벼락에 달린 조그만 입구가 열려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자 관람객이라곤 하나뿐인 나를 위해 관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맞춰 문열어 줄려고 파견나와 기다리는 관리인에게 미안한 생각에 오래 지체 할 수 없어 빠른걸음으로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찾아가는법

전철 석계역 6번출구 -  버스정류장에서 1156번를 타고- 태강릉 앞에서 내리지말고 비공개지역 강릉을 가야하므로 두 정거장 더 가 삼육대앞에서 내리면 길 건너 삼육대학 정문 옆에 강릉이 있습니다. 

* 예약 : 태릉관리소 : 0  2 - 9 7 2 - 0 3 7 0  

매주 요일.요일 / 1일  2회 : 9시 ~11시 .14~ 16시 . 최소 1일전에 예약하여 관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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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1대 왕 중종 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의 능이다
단경왕후는 1506년 반정으로 중종이 등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7일만에 폐출되었다.자식없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 무덤지역에 장례를 지냈으며 숙종 24년 (1698)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영조 15년(1739)에 무덤 이름을 온릉으로 봉하였으며, 무덤에 조각을 만드는데 있어서 장릉을 예로 삼되 죽은 후에 왕비의 무덤으로 봉해진 정릉이나 사릉을 따르게 하였다.  온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는 원형무덤으로 무덤 주위에 양석과 호석 1쌍을 배치하였다. 동물 모양의 조각을 반으로 줄인 것은 비릉(妃陵)으로 봉해진 무덤의 예에 따른 것이다. 무덤 아래에는 제사지내는 방(재실)이 있었으나 1970년 도로확장 때 없어졌다

찾아가는법

전철 구파발역 2번출구 - 360번 버스를 타고 신흥유원지내리면 - 길 건너 온릉현판이 보인다. 

답사방법

온릉은 서오릉관리소에서 관할하므로 서오릉관리소(02.359-0090.386-8139)전화로 비공개지역출입신청서를 메일로 받아 간절한 소망 담아 작성하여 FAX(02.359-0068)로 보낸후 기다리면 출입허가서를 메일로 받을 수 있다 (학문연구 목적이 아님 출입허용이 안되므로 구구절절하게 잘써 ) 출입허가서를 받으면 답사갈때 반드시 지참해야 하고 답사당일 온릉관리소(031.855-5228)에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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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2대 왕 인종( 1515~1545, 재위 1544~1545)과 인종의 비 인성왕후() 박씨(1514~1577)의 무덤이다. 3개의 왕릉(희릉·효릉·예릉)과 후궁·대군·공주의 무덤들로 이루어진 서삼릉(西, 사적 제200) 경내에 있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곳에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효성이 지극했던 인종을 기려 능호도 효릉()으로 정해졌다.인종은 재위 8개월 만인 15457월 경복궁 청연루에서 숨을 거뒀다. 같은 해 1015 부모 옆에 묻어달라는 인종의 유언에 따라 부왕인 중종과 어머니 장경왕후의 능인 정릉() 옆에 능을 조성하였다. 하지만 1562(명종 17) 정릉이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의선릉() 옆으로 옮겨갔고, 장경왕후의 능은 희릉()이라는 능호로 바뀌어 효릉 옆에 있다.인종이 자신의 장사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명한 데다 당시 인종의 외가인 대윤()과 명종의 외가인 소윤()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명종과 문정왕후 측에서 상례절차를 줄이고 능역 조성을 소홀히 한 것으로 여겨진다. 1577(선조10)1129  인성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  왕비릉을 조성했을 때  왕릉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다른 석물들도 개수하였다.

비공개지역이므로 미리부터 예약해야 한다 지금은 어떨런지 모르지만 하여간 1주일전 서삼릉출장소에 전화로 예약하고 새벽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아름다운 길 서삼릉입구에 도착하니 비공개지역 효릉을 답사하고자 하는 몇 몇의 학생들과 관람객들이 있었다.서삼릉 안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효릉뿐만 아니고 태실,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았다.해설사의 자세한 안내로 2시간 넘게 조선왕릉의 아름다운 오솔길을 걸으며 선조님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찾아가는법

전철 삼송역 5번출구로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041번 마을버스를 타고 - 약 10여분을 달려 삼송동 허브나라에서 내려 -  길건너 서삼릉 안내판 방향으로 약 15분 쉬엄쉬엄 걸어가면 원당목장 경마교육원옆에 서삼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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