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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묘

서삼릉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 효릉뿐 아니고 회묘. 태실. 소경원. 왕자. 공주묘. 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다. 그중 회묘는 성종의 첫번째 계비지만 조선 최초로 후궁 출신 왕후가 된 여인이며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인수대비와 후궁들에게 미움을 사 결국 사약까지 받게된 인물이다.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40기중 하나는 아니지만 회묘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비공개지역이므로 소개합니다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의 서삼릉 경내에 있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1969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대학의료원 자리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한 것이다.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회릉으로 추숭하였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회묘로 강봉되고 신주는 묘 곁에 묻혔으며, 석물은 봉분과 함께 남아 있다가 서삼릉 내의 귀인()숙의()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기구한 삶을 살다간 폐비윤씨. 성종의 첫번째 계비지만 조선 최초로 후궁 출신 왕후가 된 여인이다.  [출처] 네이버 폐비윤씨의 수난 

일단 그녀의 나이 또한 유명한데 정확히 알려지진 않았으나 주변인물들로 유추해보면 성종보다 무려 12살이나 연상이다 .성종은 조선 역사상 최고로 많은 비와 많은 후궁을 둔 왕이다. 정치는 잘했으나 여색을 밝히는 왕이었으니 나이 많은 윤씨의 눈엔 질투심이 없다 하더라도 여자의 입장 그것도 중전의 입장에선 못마땅했을 것이다.윤씨는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무명을 짜서 직접 시장에 내다 팔아 어머니를 봉양할 정도로 가난한 사대부집이었다고 한다.그런 출신이 공신들이 판치던 세상에 원자를 회임했다고 낙하산급 인사가 단행됐으니 가만 있을 후궁들이 아니었다. 후궁들의 왕따 작전이 시작된다.내훈이란 책까지 편찬한 유교적 사상에 꽂혀 있는 인수대비가 시어머니다. 성종 역시 인수대비의 엄격함에 기를 못 펴고 살았다고 하는데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윤씨가 걸어야 할 길이 결코 녹록치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미천한 가문 출신의 윤씨를 인수대비는 가례 전부터 반대했었으니 고부간의 갈등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고 가문이 볼품없단 이유로 중전 자리에 대 놓고 도전하는 후궁들이 많았다.가장 중요한 건 윤씨의 투기인데 투기가 진짜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많은 기록에서 투기와 질투를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

그래서 중전에 앉은지 얼마안되어 후궁들의 모함이 본격 시작된다. 당시 품계로 그 유명한 엄숙의 정숙의가 중전의 투기를 이유로 대비전과 주상에게 계속 모함을 했고 심지어 곶감에 비상을 탔다는 등의 중상모략이 끊이질 않았다.  내명부의 훈계로 엄한 인수대비가 교태전에 직접 찾아가 투기와 예의가 없다는 이유로 회초리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당시 중전이었던 윤씨는 안팎으로 모진 수모를 당했다 .

기묘록에는 성종이 내시를 시켜 윤씨를 감시하게 했는데 대비가 이를 알고 내시에게 사주해 사실을 조작해 보고하게 끔 시켰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윤씨가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냈다고 하는데 성종실록엔 윤씨가 오히려 후궁방에 뛰어 들어 성종에게 뺨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어찌됐건 두 기록 모두 윤씨의 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성종의 품에서 멀어져 갔고 이미 성종의 눈 밖에 난 것은 물론 당시 삼전(정희왕후, 인수대비, 안순왕후)도 윤씨를 탐탁치 않게 여겼고 조정을 주름잡는 공신들의 눈밖에도 난 상태였다.그러기에 끝내 윤씨를 중전의 자리에서 폐위 하기에 이른다.

폐위후 폐비 윤씨는 사가에서 힘들게 살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를 염탐하던 조정에서도 원자의 생모인 만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공론이 제기됐으나 다시 한 번 인수대비와 후궁들이 공모해 성종에게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복위는 커녕 그녀를 사사하기에 이른다 .사사 전 원자(연산군)를 의식해 대비전은 주저했으나 아들이 왕위 되기 전 후환을 없애야 한다며 삼전합의를 이끌어 낸 한명회 정창손 등이 가세해 성종을 압박했고 성종 역시 직접 나서  폐비 문제에 종지부를 찍는다 . 성종 재위 10년 윤씨를 서인으로 폐하고 것도 모자라 좌승지 이세좌에게 사약을 내려 마을주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녀를 사사한다.

기묘록에 따르면 윤씨는 피눈물을 닦아 피로 얼룩진 수건을 어머니 신씨에게 전하면서 내 아이가 보위에 오르거든 나의 슬프고 원통한 사연을 알려 주오.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주시오. 라고 지금의 건원릉 옆에 안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렇게 폐비 윤씨는 사사되었고 그녀의 묘 또한 천장과 이장을 반복하다 끝내 이자리에 모셔졌다 .연산군 일기 1496년 3월 13일자엔 무덤을 발견한 연산은 묘가 허물어지고 구멍이 뚫려 여우와 살쾡이들이 시신을 먹어치웠을 것 같구나, 어찌 이리 무심할 수 있는가' 라고 애석함과 분통을 토로한 기록이 있는데 당시 묘의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회묘를 천장할 때 지관은 없었나 보다..... 단지 마땅히 이장할 자리가 없어 후궁묘역 좌측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능침공간은 그럴듯 하게 조성되었지만 무엇보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볕도 잘 들어오지 않아  매우 음산한 기운이 감돌아 음기가 강하다. 생전에도 편한 삶을 살지 못했고 천수도 누리지 못하고 사사된 것도 모자라 죽어서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우여곡절 끝에 자리를 잡았어도 편히 쉴 수 없으니 이보다 더 기구한 운명이 어디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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