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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쓰기 6

 

 

■ 군더기는 과감하게 없애라 

 

* 글은 앞 문장과 뒷문장이 서로 맞아야 한다.

 

* ..했다,..다 ,않는다. 없다,들어왔다.규칙성이 일정하게 된 글은 읽으면서 답답함을 느낀다.

 

그러므로 -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절의 길이를 조절해야 한다

 

* 문장의 길이가 짧았다 길었다 해야 한다 .

 

수필의 제목 

 

.지나치게  감각적,자극적인 제목, 감상주의적 제목, 작위적으로 길이가 늘어난 제목들은

대개가 실명론적 허명론의 소산이다.

 

예) 매화향기를 소재로 해서 쓴다면 -

 

 " 어떤 향기 "로 하면 = 유명론적 제목.

 " 매화 향기 "= 실명론적 제목.

 " 은은한 향기 속에 묻혀 = 허명론적 제목.

 

* 치장과 화장이 지나친 제목은 시사성

함축성이 저속한 격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 수필은 서두에서 좌우 된다.

 

* 不而殺六通 (일불이살 육통) 

  한 가지 잘못으로 모든 것이 실패

 

 귀납적 방법

 

구체적 사실로부터 명제나 법칙을 이끌어내고 특수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찾아내

일반적 결론을 유도하는 것.

 

 연역적 방법

 

한 가지 일을 놓고 다른 것을 연상해 생각하게

하고,경험 한 것이 아니더도 논리적으로

"그럴 것이다 "라는 필연적 해석을 하는 것.

 

* 수필문장의

  마무리 부분은 여운이 담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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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의 5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1632년(인조 10) 왕으로 추존된 원종( 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 구씨(1578∼1626)의 무덤이다.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 202호로 지정되었다. 인조반정(1623)으로 아들 능양군인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에 봉해졌고, 인조 10년 (1633) 원종의 칭호와 함께 그의 무덤을 장릉으로 불렀다 . 원종의 무덤은 원래 양주군에 있었으며 1622년(인조 즉위) 흥경원()이라는 원호()를 받았다. 1627년(인조 5) 현 위치로 옮겨졌고, 1632년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면서 장릉()이라는 능호를 받게 되었다. 한편 1626년 조성된 인헌왕후의 무덤은 현 위치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가 1627년 원종 옆으로 이장되었다.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고 봉분 아래로 얕은 호석()만 둘렀는데 이는 추봉된 다른 왕릉의 전례를 따른 것이다. 각 능 앞에 상석이 놓여 있고, 상석 좌우로 망주석 1쌍이 있다. 봉분 주위로 석양()·석호() 각 2쌍을 교대로 배치하였으며, 봉분 뒤쪽으로는 3면의 곡장(;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봉분 아랫단에 문인석 석마() 각 1쌍과 장명등, 그 아랫단에 무인석·석마 각 1쌍이 있고, 능원 밑에 정자각 비각 수복방 홍살문 재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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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쓰기 5

언제나 표준어를 사용해야 한다.  
표준어를 사용한다 해도 문장과 어울리지 않으면 과감하게 쓰지 말아야 한다

 

누가 누구에게  쓴 것인지  문장의 글속에 나타나야 한다.

 

* 무생물체를 생물체처럼 생각하고 감정이 없는 사물을 감정이 있는 것처럼 쓰는 비유법을 {활유법}이라 한다.

 

* 주장을 하거나 요구하거나 설명하고 훈계하는 서두는 특별한 형식을 제외하고는 바람직하지 않다.

 

" 무엇은 어떻게 되기 마련" " 무엇은 어떠한 법이다 "라는 식의 훈계조나 설명조는 서두에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예)"인생은 누구나가 한 번 태어나면 만났다 헤어지게 마련이다"

이런 표현은 -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진부한 얘기인 것이고,신선미를 잃고 있다.

 

서두에서 한시의 명구 잠언.혹은 남의 시를 인용하는 것은 적절하다.

 

(작품의 내용이나 품격이 명구를 인용할 만큼의 글일때는 문제없다)

그러나 인용하기 좋아하는 글일수록 섣부른 지식 자랑이 된다.

 

그러므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두 구절 일부분으로 그쳐야 한다

 

대화체로 시작되는 부분은 지문으로 풀어 써야 한다.

 

)"그렇게 큰 구두는 없습니다" 십여 년 전의 일로 기억된다.

245사이즈의 구두를 찾던 내게, 제화점 주인은 점잖게 무안을 주었다를 -

"십여 년 전의 일이다. 245사이즈의 구두를 찾았더니 그렇게 큰 구두는

없다며 제화점 주인은 점잖게 내게 무안을 주었다" 로 고쳐 써야 한다.

 

대화체 형식은 소설의 형식이다 .

 

* 서두가 논리적문체로 시작이 되면 =

  내용이 사회적. 비평적. 성격을 띤다.

 

* 서두가 부드럽게 시작되면 =

  정서적 분위기의 글이 된다

 (초심자의 경우 대부분

  서두가 논리적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 서두의 시작은

  글 분위기에 맞게 담담하게 전개돼야 한다.

 

* 어느 경우이든

  문맥이 통하고 무리가 따르지 않아야 한다.

 

* 자기체험을 쓰는 글이므로 시간대에 따라

  쓰기 보다는 재구성을 해야 좋은 글이 된다

 

* 하루의 일과 중 어느 부분을 시작으로 하든 - 서두.전개와  마무리 부분이 짜여지면 된다.

 

문맥은

   문장이 제자리에 놓여 있을 때라야 통한다 

 

문단과 문단이 통하지 않을 땐

접속사로 잇지만,그렇게 하지 않고도 서로 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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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조선 20대왕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 조선 20대 경종 (재위 1720∼1724)과 그의 비인 선의왕후의 무덤이다. 경종은 희빈장씨의 소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하여 왕위에 오른지 4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일반적으로 쌍릉은 좌·우로 조성하지만 이 무덤은 앞·뒤로 무덤을 조성한 상하이봉릉(上下異封陵)이다. 이처럼 앞·뒤로 만든 것은 풍수지리설에 의한 것으로 효종과 인선왕후의 무덤인 영릉에서 처음 나타났다. 왕릉에는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대신 무덤 주위에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했는데,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간지가 방위에 따라 문자로 새겨져 있다. 난간석 밖으로 망주석·장명등·문무석과 말·양·호랑이가 있다. 무덤의 석물 배치와 양식은 명릉과 같이 규모가 작고 간소한 후릉제도를 택하였다.  왕비릉의 석물 배치는 왕릉과 같으나 무덤 뒤에 담을 두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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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릉(健陵)은 정조(正祖)와 비(妃)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 淸風)의 능(陵)으로 경기도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에 있다.조선 제22대 왕 정조( 1752~1800, 재위 1776~1800)와 부인 효의왕후() 김씨(1753~1821)를 합장한 무덤이다. 정조의 아버지로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장조 (祖, 사도세자)와 헌경왕후 홍씨의 합장묘인 융릉()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건릉은 봉분 안에 2실을 갖춘 합장릉이다. 정조는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휘는 산(祘), 자는 형운(亨運),호는 홍재(弘齋)다.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 (莊獻世子: 思悼世子)이고 ,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惠慶宮: 惠嬪) 홍씨(洪氏)이다. 1759년(영조 35)에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영조 38) 2월에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이 해 5월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1764년(영조 40)  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뒤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다.

인적이 드물어 뭔가 불쑥하고 나올것 같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솔밭길과 숲길 그렇게 긴 오솔길을 지나고 환하게 밝은 곳에 짜잔하고 화려한 왕릉이 보인다.

사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 선 왕 릉은 대부분 비슷하지만 우거진 나무들 속에 숨겨있는 보물 (세계문화유산)을 보기 위해 걷는 오솔길과 솔밭길의 아름다움은 백날 이야기 해봐야 직접 가보지 않고선 느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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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쓰기 4

 

수필의 서두는 작품성을 좌우 한다

 

. 서두가 독자를 끌어들이게 할 것인가 

 

. 서두는 차분한 말로

  정적 분위기를 주는 게 효과적이다.

 

. 서두의 목소리가 높아서는 안된다.

 

경수필의 경우 

요구하거나 교훈적이어서는 성공적인 수필이 안된다

 

서두의 표현에 있어서 유의할 사항 "

 

. 첫 구절 시작이 지시대명사 "그"  " 어느" 로 시작 되는 것은  금물.

 

* 왜냐하면 -

 

이런 대명사의 시작은 "막연한 상황"을 말하는 격으로 사실 개념과 떨어져 실감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독자를 끌어들이기에 부적당하다.

 

1인칭대명사 ""로 시작하는 경우에는 -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는 서두에 붙는 "나" 는 군더기일 뿐이다

 

수필은

   문장 주체가 이미 "나 " 이기 때문이다 

 

* 예외일경우 - 


작자 자신을 강조해야 할 경우.

막연히 지시대명사 " 그 "로 시작 되는 것은 처음부터 원칙에서 벗어난다.

 

* 문장을 분식(분칠하듯 꾸미는 것)하는 것은 서두에서 금기사항

 

 어떻게 써야 하는가 ?

 

.모범이 될만한 좋은 글을 많이 읽어야 한다.

.소재를 만났을 때 수필은 시작된다.

.일정한 형식이 없다.

.도덕적 가치 개념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조그만한 얘기거리 밖에 안되는 소재라도  그것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과 생각하는 것이

 인간적일 때 수필이 가치를 지닌다

.솔직하고 소박해서 진솔성이 있어야 한다.

 

예) 가을 !

감탄사를  쓴 것은  강한 표현이므로 조용하고 차분하게 시작하는 게 좋다

 

* 말할 때는 " 애인 " " 사랑한다 "는 말을 예사로 할 수 있으나 수필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독자가 알 수 있도록 함축한다.

 

예)"옥포만에 오자마자 짝사랑 애인을 갖게 되었다"

이런 표현은

개인 일기에나 쓰는 말들이다.

남에게 읽혀지는 문장에 거리낌없이 이런말을 드러내는 것은 수필문장의 품격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는 소치며

평소에 작가의 교양을 의심하게 하는 표현이다.

또한 이런 식의 표현은 소설적 수법이고 서양의 언어 풍속에서 온 잘못된 생각의 표현이다.

 

" 옥포만에  오자마자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 " 쯤으로 하면 된다 "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는 말속에 은근한 깊이가 스며있기 때문이다

*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함축있는 말을 쓸때 -   향기를 내는 글이 된다.

 

* 얄밉도록,야호.오메 따위의 표현은 수준이 떨어진다 - 침착하지 못한 문장으로 호들갑을 떨고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서두를 의문형식의 강조법을 쓰는 것은 안정감을 잃게 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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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쓰기 3

 

 

감정표현도 너무 지리하게 연장함 안된다

적당히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고 느낄 수 있을 만큼만 하면 된다.

 

 " 매표원 아저씨 " - 

여기서도 아저씨라는 말은 직접대화할 때나 쓰는 말이다.그냥" 매표원이라고 하면 된다.

 

 " 아빠. 타오셨다.정하셨다...... 그런말은 작자가 말한 대상은 남편을 가리킨 것이기에

표현상으로 보면 친정아버지를 말한 것처럼 보인다.

독자를 의식하면 그런 말은 삼가해야 한다.

 

교양인이라면

  당연히 글로 쓸 때는 "남편"이라 해야 한다

 

" 말씀하셨다 " 도 " 말했다".로 써야 한다.

 

글에서 작자의 사상이나 생동감 있는 감정이 들어가야 한다.

 

"세수하고 밥 먹고 학교에 갔다"는 식의 어린이들의 보고문은 안된다

 

문맥이 아무리 정확해도 아무런 감흥이나

공감대를 이루지 못하면 수필이 아닌 보고문 또는 기록문에 불과하다.

 

어떤 형태든 중심사상이 들어가야 한다.

 

수필도

실체적 대상에서 심상의 대상으로까지 확대시킬 때 - 수필의 주제는 분명해진다.

이것이 바로"주제의식" 이다.

 

 문장은 쉽게 꾸미지 말아야 한다.

 

 수필의 특성은 소박한데 있다.

또한 글 속에 감정이  숨겨져 있는데 있다.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글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독자가 글 속에서 감정을 찾아내게 하는 게 소박한 글이다 

 

* 예를 들어보자

"흐트러진 마음 가득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날" 솔직한 표현이 아니다.

무엇을 얘기 할려는 건지 뜻이 명확하지 않다

너무나 아름답게 꾸미려고한 까닭이다.

마음이 안개처럼 흐려졌다는 뜻인지

실제로 안개가 낀 것을 말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얘기다.

 

고쳐본다면 -

 

" 안개가 자욱히 내려서 흐트러진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

 

" 표정을 저당잡혔다"느니

" 저항의 몸짓을 상실한 빛깔 없는 생활인의 모습이니

이런 표현들은  지나치게 꾸며서 말 장난에 불과한 알맹이가 없는 표현이다.

이해하기 힘든 시를 써놓고 자기만 알 듯 좋은 문장이라고 착각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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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재위 1724~1776)의 둘째 아들로, 사후 왕으로 추존된 장조( 1735~1762, 사도세자)와 부인 헌경왕후() 홍씨를 합장한 무덤이다.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인 건릉()과 함께 1970526일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1762(영조38) 521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는 723일 배봉산() 아래 언덕에 예장되었으며묘호를 수은묘()라 하였다. 1776(정조 즉위) 3월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개칭하고, 존호도 사도()에서 장헌()으로 개칭하였다.1789(정조 13) 영우원은 다시 현융원()으로 바뀌었고, 같은 해 107일 현 위치로 이장되었다. 189911월 장종()으로 추존되고 무덤도 융릉()이라는 능호를 받았으며, 그해 12월에는 장종에서 장조()로 묘호가 다시 바뀌었다. 1762년 이른 봄. 세자로 책봉된 영조의 둘째 아들 선(사도세자)은 뒤주 속에 갇혔다. 스스로 자결할 것을 명한 영조의 뜻을 거역하자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둔 것이다.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던 선은  8일 만에 죽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것도 왕권을 물려받을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모략과 당파싸움으로 얼룩진 조선 구중궁궐의 암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융릉은 당파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아비로부터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묘다. 본래 경기도 양주군 배웅산에 있던 것을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면서 그 해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했다.정조는 생전에 하지 못한 효를 다하려는 마음으로 현릉원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야트막한 구릉은 숲을 우거지게 하고 온종일 볕이 드는 자리에 부모를 모셨다. 릉 주변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세웠고, 릉을 한 바퀴 두른 석축 또한 꽃문양이 화려한 조각으로 수놓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현릉원에서 오리 떨어진 곳에 절 하나를 지어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게 했으니 그게 바로 오늘의 용주사다.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죽어서 아버지 곁에 있기를 소망했고, 그의 유언대로 융릉 곁에 묻혔다. 그 두 개의 왕릉을 합쳐 융건릉, 혹은 화산릉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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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쓰기 2 

 

 

 

대화체는 반드시 삼가해야 한다.

 

작가의 언어로 나와야 하는 1인칭 문장이 되어야 한다.

 

* 등장인물의 입을 비는 것은 기량 부족이다.

 

* 문학성은

  1차적으로 독자를 감동시키는 데 있다.

 

* 문학성은 어떤 것이든지 궁극적으로  인간의 문제가 담기면서 감동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 수필가는 예리한 관찰력과 풍부한 상상력.해박한 지식.심오한 사상.뛰어난 예술감각.뚜렷한 개성이 있어야 한다.

 

* 자신의 결함 또는

  실패담을 솔직하고 꾸밈없이 다뤄야 한다

 

* 독자에게는 느끼고 생각할 여지를 남겨 놓는 글이 좋은 글이다.

즉,말을 다하면 독자는 지루함에 빠진다

 

* 수필의 생명은 함축이며

  함축을 위해서는 문장이 간결해야 한다

 (군소리는 글을 죽인다)

 

* 여러 사람에게 공감을 주어야 한다.

 

수필은 여운이 길어야 한다.

 

* 결론을 단정하면 글은 여운을 잃는다.

 

* 야비하거나 표독한 표현은 품위를 깍는다.

 

* 비판은 공정해야 하며

  자신의 분수를 염두하여야 한다.

 

* 비판을 하더라도 직접적인 것보다 간접적인 것이 수필에 어울린다

 

* 범속을 벗기 어려운 것이"여성" 을 대상으로 할 때가 되니 저속한 표현은 삼가해야 한다.

 ( 예: 아랫배가 어쩌구..지방질이 많고..)

 

* 예문)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소태씹은 맛이 되어 떨떠름한 표정을 짓게 된다.

이런 표현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수필문장은 감정처리가 격을 좌우하는 것이 관건이다.

 

*" 얼른 대답을 못한다 " 라든가 "언짢아진다" 라고 하면 말속에서 드러나지 않은 말

(감정)이 담겨져 감정을 걸러 낸 격이 된다.

 

* 수필은 감정을 걸러내야 품위가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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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 [효종대왕]

조선 제17대 왕 효종( 1619~1659, 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 장씨(1618∼1674)의 무덤이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인 영릉()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었다.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배치한 것이 아니라 아래위로 배치한 쌍릉 형식이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인데 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인 의릉()도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처음엔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의 태조 무덤인 건원릉()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봉분 안으로 빗물이 샐 염려가 있다 하여 1673년(현종 14) 세종의 무덤인 영릉() 동쪽으로 능을 옮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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