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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1대 왕 영조(, 재위 1724~1776)의 맏아들로 사후 왕으로 추존된 진종( 1719~1728)과 부인 효순왕후 조씨의 무덤이다 3개의 조선왕릉(공릉·순릉·영릉)으로 이루어진 파주삼릉 (, 사적 제205)에 속해 있다.1728년(영조 4) 11월 16일 10살의 나이로 창경궁 진수당에서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의 무덤은 ‘효장묘’라 하였는데 1776년(정조 즉위) 왕(진종)으로 추존되면서 무덤도 영릉()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병풍석과 난간석은 설치되지 않았다. 각 봉분 앞에 상석 1좌씩 놓았고, 그 양측에 망주석 1쌍을 세웠으며, 봉분 주위에 석호()·석양() 각 2쌍을 교대로 배치하였다.봉분 아랫단에는 문인석,석마() 각 1쌍과 사각옥개형 장명석을 설치하였고, 무인석은 세우지 않았다. 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 정자각.비각.홍살문이 있다. 왕과 왕후로 추존되기 전 세자와 세자빈 무덤으로 조성되었을 때 설치한 모습 그대로이며, 추존 후에도 별도의 가설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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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릉은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추존이란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세상을 떠난 후에 왕의 호칭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덕종은 왕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의경세자의 시호를 받았으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경릉은 서오릉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능으로,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원칙적으로는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왕, 오른쪽 언덕(동쪽)이 왕비의 능이지만, 경릉은 오른쪽 언덕(동쪽)에 덕종을 모셨고 왼쪽 언덕(서쪽)에 소혜왕후를 모셨다. 이는 덕종은 왕세자의 신분으로, 소혜왕후는 대왕대비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신분에 맞게 능을 조성한 것으로 해석된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덕종의 능침은 장례를 간소히 치루라는 세조의 명으로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여 봉분을 크게 만들었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석양과 석호만 배치하고 나머지 석물은 생략하였다. 소혜왕후의 능침은 일반 왕릉의 형태로 조성하여 봉분은 난간석을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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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순조 (,재위 1800~1834)의 원자로 왕세자(효명세자)로 책봉되고,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1809~1830)과 부인 신정왕후() 조씨(1808~1890)를 합장한 무덤이다.효명세자는1830년(순조30) 5월6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숨을 거두었고,같은 해 8월 4일 서울 석관동에 있는 경종 무덤인 의릉() 좌측에 무덤을 만들어 연경묘()라 하였다. 1835년(헌종 즉위) 5월 19일 효명세자가 왕(익종)으로 추존되면서 연경묘는 수릉()이라는 능호를 받았다.그 후 풍수상의 문제로 2번에 걸쳐 능을 옮겨 1855년(철종 6) 현재의 위치인 동구릉(, 사적193호)의 태조 무덤 건원릉 좌측에 자리 잡았다. 신정왕후는 1890년(고종 27) 4월 17일 경복궁 흥복전에서 숨져 같은 해 8월 30일 익종과 합장되었다.
조선 왕릉은 일반적로 3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수릉은 2단으로 되어 있다. 봉분이 있는 윗단에는 봉분을 둘러싼 12칸의 난간석과 혼유석 1좌, 석양()·석호() 각 2쌍 망주석 1쌍이 있으며 3면의 나지막한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랫단에는 무인석·석마() 각 1쌍, 문인석·석마 각 1쌍이 배치되어 있다. 문인석은 길쭉한 얼굴에 눈과 입술이 가늘게 표현되고, 어깨를 움츠리고 목을 앞으로 빼고 있는 형태로 조선 후기 인물 조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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