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ALL

불암산-수락산 연계산행

불암산 정상부에 있는 큰 바위가 마치 부처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불암산이라고 부르게되었다. 높이는 509.7m이며 필암산.천보산이라고도 한다. 산의 능선은 남북으로 이어진 방향인데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과 경기도 남양주의 경계를 이룬다. 불암산은 단조로우나 거대한 암벽과 절벽, 울창한 수목이 어울려 아름다운 풍치를 자랑한다.

수락산 높이는 638m이며 서울의 북쪽 노원구 상계동과 경기도 남양주시 그리고 의정부시와 경계를 이룬다. 서쪽에는 도봉산을 마주보며 남쪽에는 불암산이 위치한다. 수락산이라는 이름은 거대한 화강암 암벽에서 물이 떨어지는 모습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암벽이 많이 노출되어 있으나 산세는 그리 험하지 않다. 주말이면 산악인들로 항상 붐비는 산이며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과 함께 서울근교 4대 명산으로 불린다.

수락산 등산코스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에서 올라가는 코스가 가장 경치가 좋고 수락산의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다사기막에서 오르는 또다른 길은 향로봉을 지나 영락대, 칠성대, 기차바위를 지나는 등산로가 있는데 가파른 암벽능선을 타고 가는 험로이기 때문에 초보자는 위험한 길이다. 그외 상계동 은빛아파트에서 물개바위를 지나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고 의정부시 장암동에서 시작해서 노강서원과 석림사를 거쳐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암산과 수락산 연계산행을 위해 등산코스를 상계역에 내려 정암사 - 깔딱고개 - 암릉구간 - 불암산 정상 - 다람쥐동산 - 덕능고개 - 불암산과 수락산을 연결해주는 야생동물의 이동통로 수락산 하강바위.알바위 - 코끼리바위 - 철모바위 - 수락산 정상 - 석림사(장암역)길로 하산. 쉬엄쉬엄 7시간 30분의 긴 산행이었지만, 서울근교 북한산 도봉산.관악산과 더불어 4대 명산중 기암괴석과 시원한 풍광으로 수락산을 최고로 꼽는다면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불암산의 명물 생쥐바위 정말 생쥐같이 생겼다

수락산의 종바위 기차바위 코끼리 바위

카메라 줌으로 당겨보니 정말 코끼리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형상이다.

수락산의 명물 공기돌바위 암벽타는 분들이 대단하다.

 재미있는 다른글도 보세요 

LIST
SMALL

태실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후 태를 봉안하는 곳

왕실에서는 왕세자를 비롯하여 왕자, 세손, 궁주, 옹주가 태어나면 태(胎)를 석실(石室)에 담아 전국 길지(吉地)를 가려 봉안(奉安)하고 태봉(胎峰)이라 해 그 주변에서는 방목. 벌채. 개간을 금하였다. 태실 역시 집중관리라는 미명하에 태조의 태실 등 22기와 왕자 등 32기의 태실을 1930년대를  후하여 서삼릉 경역내로 이설했다. 일제강점기에 전국각지에 산해되어 있는 태실을 집중관리한다는 미명아래  국운을 쇄락시키고 민족정기를 말살시키려는 의도로 옮겨진 곳이다.서삼릉 경역내 묘 및 태실의 집장은 능역 일원을 공동묘역으로 변형케 해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비하 훼손하고자 한 일제의 의도적 책략이었다.

비석의 뒷면에는 태가 있던 곳의 위치와 날짜가 적혀있었는데 일본연호를 삭제한 흔적이 있다.

태실 (비공개지역) 

아름다운 길 서삼릉입구에 도착하니 비공개지역 효릉을 답사를 신청한 학생들과 관람객이 있었다.

서삼릉 안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 효릉뿐 아니고 회묘. 태실,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았다.

그 중 태실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아니지만  태실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서삼릉 내의 비공개지역이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종대왕의 태도 묻혀 있네요 ~

찾아가는법

전철 삼송역 5번출구로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041번 마을버스를 타고 10여분을 달려 삼송동 허브나라에서 내려 길건너 서삼릉 안내판 방향으로 약 15분 쉬엄쉬엄 걸어가면 원당목장 경마교육원옆에 서삼릉이다                 

 신들의 정원 다른 곳도 보세요 

LIST
SMALL
노처녀의 넋두리                                      


 

 

 

십대와 삼십대를 영영 보내버린 아쉬움과 엉겁결에 사십 고개를 넘어선 당혹감으로 예전엔 하잖은 일로만 인식되어 왔던 것들이 이제는 우선제일로 차지하게 되었음은 분명 부모님의 성화 때문만은 아니다 .작년 이맘 때였던가 . 그럭저럭 맘에 들면 못이기는 척 OK하리라 다짐하고 동생의 특별코디를 받으며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나간 설레임의 자리를 끝으로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학창시절 제일먼저 결혼에 골인할 것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부정이나 하려는 듯 졸업후 사회에 고부가치 노동력을 제공하느라 연애할 시간을 갖지 못했을 뿐이며 몸 무게가 쬐금 더 나간다는 것이야 따지고 보면 아이키우기 어려운 한집안의 튼튼한 며느리로 적격이 아닌가 또한 글로벌한 무한 경쟁시대 요즘세상에 풍부한 사회경력을 지닌 능력있는 커리어우먼으로 지적인 언행과 가녀린 여인네 같은 순수함을 간직한 연륜있는 재원인 만큼 결코 헛 나이는 먹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보면 이만한 신부감도 흔치 않을  텐데 그깟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장점들을 덮은채 절대 평가만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결혼적령기라는 게 왜 존재하며 노처녀라는 단어는 왜 생겨 났는가.이것은 남성 우월주의에서 나온 것이며 여성을 차별하는 부도덕한 세상에서 만들어진 남성의 일방적 언어가 아닌가 싶다. 이제 매일같이 반복되던 부모님의 성화는 니팔자니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포기한 지 오래고, 간혹 동창회에라도 나가보면 아이가 고등학교를 입학했다느니 남편이 부장으로 승진했다느니 미주알고주알 자기들 관심사만을 얘기하니 꿔다 놓은 보리자루 취급받는 나는 뭔가 싶다.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주일학교 교사로 피아노 반주로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는 내게 왜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지 않는지.행여 , 결혼명부에 중대한 착오라도 생겨 이팔 청춘으로 잘못 기재돼 있는 건 아닌지...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지만 농촌총각 장가 보내기도 있던데 우선 노처녀라는 기준부터 없애버리고 무슨 국가적 차원에서 집 한 채를 준다든지 그런 인센티브가 있었음 좋겠다 ~ ㅋ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은 나라의 기초며, 국가발전을 이루는 세계화의 근본입니다. 저에게 백마를 타고 오는 왕자님을 주신다면 아내의 사랑스러움과 어머니의 알뜰한 생활력으로 부국강병 대한민국을 위해 (?) 일조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만한 용기도 없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벗꽃이 만발하는 거리에 뭐가 그리 좋은지 희희낙낙 오가는 선남선녀들의 모습을 보니 허전함에 넋두리만 늘어간다 .....

재미있는 다른글도 보세요 ▼ 

LIST
SMALL

왕자공주묘

서삼릉에 묻힌 망자의 숫자로 최대다. 서삼릉 내에 후궁, 왕자, 공주의 묘 46기가 있다. 이중 희묘(禧墓)와 경선군묘(慶善君墓) 이외의 묘는 후궁과 왕자공주묘로 구분돼 집장(集葬)돼 있다. 가로 세로 반듯하게 정렬한 무덤군이 보기에 참 민망하다. 왕릉 경역내에는 후궁.왕자.공주의 묘를 쓸 수 없음에도 서삼릉에는 이렇게 많은 묘가 있다니 아이러니하지만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고 합니다. 경술국치로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 11월 일본은 왕릉의 품격을 비하하고 훼손키 위해 궁내성 소속으로 망조왕실(亡組王室)을 관리하기 위해 이왕직(李王職)이 설치됐다. 이왕직에서는 서울, 경기 일원에 산재한 후궁, 왕자,공주등의 분묘를 집장관리한다는 명목아래 서삼릉 경역내 집장지가 선정됐다. 일제때 숙종의 후궁인 소의 유씨의 묘외 15기와 세종대왕의 1녀 정소공주묘외 18기를 천묘 집장했다

8 ·15 광복 후에는 일제 때 옮기지 못한 후궁묘 중 묘역 주변 개발로 인해 존치가 어렵게 된 명종 후궁 경빈이씨묘 외 6기를 천묘했다.왕자묘로서는 고종의 1남 완화군묘를 천묘했다. 아직 서울 경기 일원에 묻혀 있는 일부와 서삼릉의 46기가 전부다. 이렇게 서삼릉 경역내 집장은 능역 일원을 공동묘역으로 변형시켜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비하 훼손한 일제의 의도적 책략이었다.

왕자.공주묘 (비공개지역)

아름다운 길 서삼릉입구에 도착하니 비공개지역 효릉을 답사하고자 하는 몇 몇의 학생들과 관람객들이 있었다. 서삼릉 안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 효릉뿐 아니고 회묘. 태실,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았다. 그 중 후궁묘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아니지만 왕자.공주묘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서삼릉 내의 비공개지역이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릉만 후다닥 답사하면 될 줄 알았지만 효릉이 희릉.예릉과 함께 붙어 있는 게 아니라 빠른 걸음으로 10여분을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고 가는 길에 소경원 왕자공주묘,후궁묘,회묘,태실등 많은 비공개지역을 함께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찾아가는법

전철 삼송역 5번출구로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041번 마을버스를 타고 - 약 10여분을 달려 삼송동 허브나라에서 내려 - 길건너 서삼릉 안내판 방향으로 약 15분 쉬엄쉬엄 걸어가면 원당목장 경마교육원옆에 서삼릉이 있다.          

여기서 잠깐 !  공주라는 말은 ?

주는 중국 진 · 한나라 때 비롯된 말이라고 하나,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이전부터 공주라는 말을 사용했다. 낙랑공주와 고구려의 온달에게 시집간 평강공주가 있으며 <삼국유사> 서동요의 주인공 선화공주도 있다. 제도적으로 공주라는 호칭은 고려 문종 때의 관제에 따르면 대장공주와 함께 정1품이었다. 그 뒤 공양왕 때 도평의사사의 건의에 따라 왕의 딸은 공주라고 불렸으나 조선 초기까지도 제도가 미비해 왕녀·궁주. 옹주 등 여러 가지로 불려 왕의 적설녀 외에 왕의 후궁도 공주라 칭했다. 그 후 조선에서는 왕의 정실이 낳은 딸을 '공주'라고 하고, 후궁이 낳은 딸을 '옹주'라고 해 구별했다. 공주는 지극히 존귀한 신분으로서 품계를 초월한 외명부다.

공주가  혼인하게 되면  모든 절차와 준비는  종부시(宗簿侍)에서  주관해 국법에 따라 예로써 치렀다. 공주의 남편은 종1품의 위(尉)인 광덕대부 숭덕대부로 의빈(儀賓)에 봉작됐으며 그에 준한 녹봉을 받았다.  의빈이 죽은 뒤에도 공주는 계속 쌀·콩·보리를 봄과 가을에 받았다. 공주가 낳은 아들은 처음 종7품, 사위는 2등급 낮은 종8품의 품계를 받고 그에 준한 대우를 받았다. 공주는 내명부 · 외명부와 함께 궁중의 잔치, 왕비의 시위 혼인 및 초상 등 여러 행사에 참석했다.  공주가 죽으면 국가에서는 왕녀의 상장제도에 따라 염빈. 예장. 조묘의 3도감을 설치하고 3일간 조회를 열지 않으며, 왕 이하 궁인들은 고기를 먹지 않는 등 정중한 예우를 표했다고 한다.

 신들의 정원 다른 곳도 보세요

LIST
SMALL

소경원 (비공개지역) 

아름다운 길 서삼릉입구에 도착하니 비공개지역 효릉을 답사하고자 하는 몇 몇의 학생들과 관람객들이 있었다. 서삼릉 안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효릉뿐만 아니고 태실,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았다.그중 소경원은 청나라를 신봉한다고 하여 서인세력들에게 배척당하고 인조에 의해 독살된  비운의 왕자 소현세자의 묘라고 합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릉 40기중 하나는 아니지만 소경원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서삼릉 내의 비공개지역이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가슴 아픈 이름 소현세자 

이름은 왕(). 인조의 장자, 효종의 형이며,어머니는 한준겸의 딸 인열왕후다. 1625년 세자로 책봉되었고, 부인은 강석기의 딸인 민회빈강씨이고 보통 강빈이라고 부른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한후,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후 9년간 심양()의 세자관에 머물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동시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서  창구역할을  맡아 조선인 포로의 송환문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군량·선박 요구,각종 물화의 무역 요구등 정치·경제적 현안을 맡아 처리하였다. 또 청나라 인사들이 벌인 행사에 참여하고 청나라 황제의 사냥 등에도 동행하였다.
1640~1642년 인조의 병문안을 위해 잠시 귀국하였고,1644년 청나라 도르곤의 원정군을 따라 베이징에 들어갔다. 베이징에서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그로부터 서양 역법과 여러 가지 과학에 관련된 지식을 전수받고 천주교에 관해 소개받았다.

당시 베이징에서 명나라 멸망의 현실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인지 그는 청나라의 현실을 인정하고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원활히 하려고 애썼다. 이에 청나라의 경제적 요구를 들어주며 환심을 얻었는데,그들은 그를 ‘소군()’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세자관으로 들어가는 조선 정부의 재정부담이 커졌고, 동시에 부왕 인조의 의구심을 사게 되었다. 인조는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즉위시키고 자신을 몰아내려는 공작을 펴는 것으로 의심하고, 그를 감시하였다.소현세자는 베이징에 머문지 두어달이 지난 1644년 11월 26일 볼모에서 풀려났으며 1645년 2월 18일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그의 나이 34세였다  

소현세자 죽음은 일본의 개항보다 200년이나 앞설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잡혀갔던 동생 봉림대군에 비해 청나라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했고 새로운 문물에도 적극적이었다. 또한 조선에서 신봉하였던 성리학이 이미 낡은 사상이라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조에게는 청나라와 가까운 인물로 인식되었고 서인 세력들에게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결국 청나라에서의 행실을 문제삼아 인조의 냉대를 받았고 급기야 병을 얻어 급사하였다. 하지만 기록과 달리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설이 정설이다.  당시 조선의 정계에서 청나라를 배척하는 분위기와 인조의 불안을 염두에 두면 충분히 가능성 있으며 인조가 후궁 조씨와 김자점에게 시켜 소현세자를 독살한 것은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 진다. 인조실록에  의하면 소현세자의 주검은 까맣게 변해 있었고 7군데 혈에서 출혈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보통 사약을 마시고 사망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또한 세자가 사망하면 치료를 맡은 어의가 문책을 받게 되는데 인조는 오히려 그를 두둔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두 아들에 대한 인조의 평가는 극명하게 달랐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있던 동안의 고초를 인조에게 고하는데 봉림대군은 청 세조를 멸시했고 볼모로 잡혀간 조선인을 데리고 왔다고 고했다.하지만 소현세자는 청 세조는 도량이 넓은 군주이며 새로운 문물을 내보이며 그가 아끼던 벼루를 얻어 왔다고 고했다. 이에 인조는 그 벼루를 소현세자 얼굴에 집어 던졌다고도 전해진다.
소현세자가 죽은뒤 인조는 왕권강화 차원에서 세손(소현세자의 장자)을 폐위하고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책봉하였다.인조는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에게도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 역시 임금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씌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효종 때 두 아들은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효종은 살아남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을 석방하자고 건의하는 황해감사 김홍욱때려죽였다고 전한다. 이후 숙종 때 강빈의 옥사를 억울하게 여기고 소현세자와 함께 복위되었다. 19세기 말에는 그의 후손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일본의 개항보다 2백년이 앞선 것으로 조선이 세계정세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라는 평가받기도 한다.

 신들의 정원 다른 곳도 보세요

LIST
SMALL

 

저는 다른 신은 몰라도 프로메테우스는 알지요

 

 

■프로메테우스■

 

우선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요약 정리하자면 - 

프로메테우스는 인간 세상에 불을 주고 신들을 본 떠 인간을 만들었다.그 덕택으로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훨씬 월등한 존재가 되었다.

하늘로부터 불을 훔친 것에 대한 제우스의 노여움으로 " 카우카소스 산상" 에 쇠사슬에 묶여 간장을

독수리에게 파먹히는 반복되는 고통을 받고 있다.

또한 판도라라는 여인을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주었다.

판도라는 아프로디테의 아름다움과 헤르메스의 설득력 그리고 아폴론의 음악을 주어진 여인이었다. 

형 프로메테우스로부터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을 주거나 하는 일을 위임받은 에피메테우

절대로 판도라 상자를 열어보지 말라는 형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열어보게 되었다.

그 순간 온갖 재앙이 인간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 마지막으로  나온것이 " 희망 " 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불행과 역경속에서도 희망이라는 미래를 보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프로메테우스는 예로부터 인류의 벗이 되었고 부당한 수난에 대한 영웅적인 인내와 압제에 반항하는 의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티탄 족의 영웅.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주어 인간에게는 문화를 은인이 되었으나, 그로 인하여 제우스의 노여움 코카서스의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제우스의 금기를 깬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라는 이름은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주신 제우스가 감추어 둔 불을 훔쳐 인간에게 내줌으로써 인간에게 맨 처음 문명을 가르친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불을 도둑맞은 제우스는 복수를 결심하고 판도라를 만들어 프로메테우스에게 보냈다.
이때 동생인 에피메테우스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는 형 프로메테우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아내로 삼았는데,

이로 인해 판도라의 상자 사건이 일어나고 인류의 불행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장래에 관한 비밀을 제우스에게 밝혀 주지 않았기 때문에

코카서스의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날마다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고, 밤이 되면 간은 다시 회복되어 영원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영웅 헤라클레스에 의해 독수리가 사살되고, 자기 자식 헤라클레스의 위업을 기뻐한 제우스에 의해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그리스신화에도 금기가 아주 많이 등장한다. 우선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줌으로써 제우스가 내린 금기를 어겼다.

또 에피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선물은 무엇이든 받지 마라는 형 프로메테우스의 금기를 어기고 판도라를 아내로 받아 인류의 불행을 초래했다.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의 이야기는 크로노스의 티탄 신족과 제우스의 올림포스 신족 사이에 벌어진 전쟁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이 올림포스 신족의 승리로 끝난 후 프로메테우스의 형제들은 운명이 엇갈렸다.

우직하게 티탄 편에서 싸웠던 맏형 아틀라스는 어깨로 하늘을 떠받치는 벌을 받았다.

둘째 메노이티오스 역시 제우스의 벼락을 맞고 지하의 암흑세계로 내던져졌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와 막내 에피메테우스는 공을 인정받아 제우스로부터 주요 임무를 떠맡았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을 공경할 인간과 짐승들을 창조하고, 에피메테우스는 피조물들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선물을 배분하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새에게는 날개, 사자에게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거북이에게는 딱딱한 등판 등이 돌아갔다.

그런데 ‘뒤늦게 깨닫기’라는 이름의 에피메테우스가 아무 생각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이것저것 주다보니

마지막 창조된 인간에게는 줄 것이 없었다. 에피메테우스는 사려 깊은 형에게 난감한 상황을 이야기했다

자신이 창조한 어떤 피조물보다 인간을 사랑한 프로메테우스는 궁리 끝에 인간에게 금지된 불을 훔쳐 주기로 결심했다.

제우스는 불이 인간의 손에 넘어가면 위험한 상황이 초래되리라는 것을 염려하여 그것을 엄하게 금하고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속이 빈 회향나무에 불을 숨겨 인간에게 건네주었다.

제우스는 자신이 내린 금기를 어긴 프로메테우스를 가혹하게 처벌했다.

그는 힘의 신 크라토스와 폭력의 신 비아를 시켜 프로메테우스를 잡아들여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쇠사슬로 카우카수스 산 절벽에 묶어 놓았다.

이어 자신의 독수리를 보내어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파먹게 했다.

하루 종일 파 먹힌 간은 밤새 다시 돋아나 이튿날 또다시 독수리의 먹이가 되었다.
그리스 신화는 프로메테우스가 겪는 고통이 3000년이나 지속된다고 전한다.

그동안 제우스는 전령 헤르메스를 통해 그를 협박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했다.

앞을 내다보는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의 앞날에 드리워진 액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불의와 억압에 무릎 꿇지 않는 저항정신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3000년 후 영웅 헤라클레스가 나타나 독수리를 활로 쓰러뜨리고 프로메테우스를 사슬에서 해방시켰다.

그제야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운명에 얽힌 비밀을 밝혀 주었다.

당시 제우스는 바다 여신 테티스에게 푹 빠져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테티스가 낳을 아들이 아버지를 몇 배 능가하는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 귀띔해 주었다.

이를 두려워한 제우스는 테티스를 단념하고 그녀를 보잘것 없는 인간 펠레우스에게 시집보냈다.

훗날 둘 사이 위대한 영웅 아킬레우스가 태어났다.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를 처벌한 제우스는 인간들도 손을 보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금지한 불을 사양하지 않고 넙죽 받은 인간이 괘씸했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인간이 불을 받은 대가로 평생 불행을 안고 살아가게 할 목적으로 최초의 여성 판도라를 만들어 인간에게 불행을 주었던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순간 전쟁과 죽음 그리고 불행 슬픔 온갖 나쁜 것이 나왔지만

마지막에 나온것이 무엇이라고요...맞습니다.

희망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이 무겁고 힘들어도 미래의 희망을 보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재미있는 다른글도 보세요 
LIST
SMALL

후궁묘

서삼릉에 묻힌 망자의 숫자로는 최대다. 후궁묘 외에도, 왕자, 공주의 묘 46기가 있다.  묘는 후궁과 왕자 ·공주묘로 구분돼 집장돼 있다. 가로 세로 반듯하게 정렬한 무덤군이 보기에 참 민망하다. 왕릉 경역내에는 후궁.왕자.공주의 묘를 쓸 수 없음에도 이렇게 많은 묘가 있다니 아이러니하지만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경술국치로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 11월 일본은 왕릉의 품격을 비하하고 훼손하기 위해 궁내성 소속으로 망조왕실을 관리하기 위해 이왕직(李王職)이 설치됐다.  이욍직에는 서울, 경기 일원에 산재한 후궁, 왕자, 공주 등의 분묘를 집장관리(集葬管理)한다는 명목아래 서삼릉 경역내 집장지가 선정됐다 .일제 때 숙종의 후궁인 소의 유씨의 묘 외 15기와 세종대왕의 1녀 정소공주묘 외 18기를 천묘 집장했다.8 ·15 광복 후에는 일제 때 옮기지 못한 후궁묘 중 묘역 주변 개발로 인해 존치가 어렵게 된 명종 후궁 경빈이씨묘 외 6기를 천묘했다 한다 .  

후궁묘 (비공개지역)

아름다운 길 서삼릉입구에 도착하니 비공개지역 효릉을 답사하고자 하는 몇 몇의 학생들과 관람객들이 있었다. 서삼릉 안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 효릉뿐 아니고 회묘. 태실,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았다. 그 중 후궁묘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아니지만 후궁묘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서삼릉 내의 비공개지역이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후궁은 참으로 슬픈 운명

후궁은 <간택후궁>과 <승은후궁>으로 구분된다. <간택후궁>의 경우 애당초 간택대상이 양반 사대부 가문이므로, 그 친정의 신분이 문제될 게 없다. 문제는 <승은후궁>의 경우다.  조선시대 궁녀들의 출신성분은 대다수가 천민 공노비였다. <승은궁녀>가 종4품 숙원 이상의 내명부 내관(후궁)에 오를 수 있는 기준은 바로 임신과 출산이다. 비록 후궁의 몸을 발어 태어났지만 왕비의 자녀라는 개념으로 후궁소생의 자녀를 다뤘고 후궁은 자신의 소생에게 존댓말과 함께 '어머니'의  호칭을 들을 수도 없고 들어서도 안 되는 신분이었다. 왕이 죽으면 왕비는 궁궐에 살 수 있지만 후궁은 궁 밖으로 나가서 살아야 한다. 승은을 입었지만 자식이 없으면 후궁의 첩지는 못받고 상궁이 된다.이런 상궁들은 왕이 죽으면 궐 밖으로 나가 비구니가 됐다고 합니다.이름도 한 번 못부르고 어머니라는 말도 못듣는 후궁들 정말 불쌍하고 가엾습니다...ㅠㅠ

만 후다닥 답사하면 될 줄 알았지만 효릉이 희릉.예릉과 함께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빠른걸음으로 10여분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고 가는 길에 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회묘,태실등 많은 비공개지역을 함께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찾아가는법  

전철 삼송역 5번출구로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041번 마을버스를 타고 - 10여분을 달려 삼송동 허브나라에서 내려 - 길건너 서삼릉

안내판 방향으로 약15분 쉬엄쉬엄 걸어가면 원당목장 경마교육원옆에 서삼릉이 있습니다 

 신들의 정원 다른 곳도 보세요

LIST
SMALL

조선16대 임금인 인조(仁祖)와 그 왕비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의 합장능(陵)으로 당초 문산읍 운천리 대덕골에 있었으나 1731년(영조7년) 석물 틈에 뱀들이 집을 짓고 극성을 부려 지금의 위치로 옮겨 합장하였다. 인조는 선조(宣祖)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추존元宗)의 맏아들로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졌는데 1623년(광해군15년) 인조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27년의 재위기간 동안에 많은 일이 있었는데 이괄의 난(李适의 亂), 정묘호란(丁卯胡亂),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은 후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고 소현(昭顯), 봉림(鳳林) 두 아들을 인질로 보내는 치욕을 당하였다. 특히 정치적으로 당파간의 싸움이 격화되어 사회가 혼란스러워짐에 따라 대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결국 1649년(인조27년)에 승하하였다. 인열왕후 한씨는 1610년 혼인하여 효종(孝宗)과 소현세자(昭顯世子), 인평대군(麟坪大君), 용성대군(龍城大君)의 4형제를 낳았으며 42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현재 장릉은 문화재 훼손방지를 위해 일반인에게 비공개 관리되고 있다

얼마전 재난지역으로 지정될 만큼  강원도 일대 고성,속초,강릉,인제 산불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많은 이재민들이 발생하였는데 ...ㅠㅠ 정말 산불조심해야 합니다.우리의 자랑스러운 소방관님들 열심히 문화재지킴을 위한 소방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방관님들 화이팅 !!

조선왕릉 40기 답사 완료 !! 

오랫동안 기다려온 비공개 지역 4곳을 (장릉,온릉,강릉,효릉) 휴가까지 받아서 다녀왔다. 신록이 푸르른 봄날 또는 단풍이 아름답게 핀 가을에 왔으면 환상적이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다. 그래도 비공개지역을 답사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뿌듯하다.

비공개 지역이므로 우선 ....장릉은 파주 삼릉관리소에서 관리하므로 파주삼릉관리소(031.941-4208)전화하셔서 답사하고 싶다 말씀하심 양식서류를 메일로 보내줄 것입니다. 그러면 <공개제한지역 출입허가 신청서>를 보내줍니다. 다운받으셔서 작성해야 하는데 학술목적 및 연구 목적으로만 허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간절한 소망을 담아 답사일과 답사 목적을 적어 팩스(031.946-0425)로 보내시면 며칠후 공개제한지역 출입 허가서를 보내줄 것입니다. 

 찾아가는 방법 

제가 다녀온 방법대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전철을타고 서울역 하차 - 경의선을 타고 금촌역에서 내려 - 건너편에서 900번 버스타고 금촌사우나에서 내리면 건너편에 장릉 현판이 보입니다. 약 15분정도 걸어가면 정문이 있습니다. 약속시간에 도착하셔서 파주삼릉관리소에 전화를 걸어 문열어 달라 하세요. 그럼 관리인이 나올 겁니다.... Good Luck !! 

 신들의 정원 다른 곳도 보세요

LIST
SMALL

조선 제13대 왕 명종(재위 1545∼1567)과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다. 명종은 조선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로 1534(중종 29)에 태어났으며 1545(인종 1)에 왕위에 올랐는데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8년 동안 수렴청정하였고 1567년 경복궁 양심당에서 죽었다. 왕비 인순왕후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32(중종 27)에 태어나 1545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575(선조 8)창경궁 통명전에서 죽었다명종이 34세로 죽자 이곳을 능지로 삼아 치장하였으며, 능 관리를 위한 관원으로  .참봉 각 1명을 두었다.인순왕후 사후 왕비의 능도 왕의 능과 함께 나란히 앉혀 쌍릉을 이루었다.능제는 국조오례의식에 따랐고 왕릉과 왕비릉에 모두 구름무늬와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12면병풍석두르고 만석 중간에 12지를 새겨넣었다.또한 12칸의 난간석과 상석1,망주석1,양석 2,호석 2쌍과 3면의 곡장이 있다.한 단 아래에 문인석 1, 마석 1쌍과 가운데 명등석이 있고, 그 아래에는 무인석 1, 마석 1쌍이 있다.무덤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고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1호선 석계역에서 내려 버스1156번을 타고 버스정류장 태강릉 앞에 내렸더니 건너편에 태릉이 있었다.

매표소에서 비공개지역 예약하고 왔다 했더니만 이곳이 아니란다. ~

그럼 진작 예약할때 얘기해주지....다시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더 가 삼육대학에서 내림 삼육대학 정문 옆에 있다.

담벼락에 달린 조그만 입구가 열려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자 관람객이라곤 하나뿐인 나를 위해 관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맞춰 문열어 줄려고 파견나와 기다리는 관리인에게 미안한 생각에 오래 지체 할 수 없어 빠른걸음으로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찾아가는법

전철 석계역 6번출구 -  버스정류장에서 1156번를 타고- 태강릉 앞에서 내리지말고 비공개지역 강릉을 가야하므로 두 정거장 더 가 삼육대앞에서 내리면 길 건너 삼육대학 정문 옆에 강릉이 있습니다. 

* 예약 : 태릉관리소 : 0  2 - 9 7 2 - 0 3 7 0  

매주 요일.요일 / 1일  2회 : 9시 ~11시 .14~ 16시 . 최소 1일전에 예약하여 관람요

▼ 신들의 정원 다른 곳도 보세요

LIST
SMALL

멀칭할 제초매트 50m와 고정핀,톱 그리고 파종할 이런저런 씨앗과 돼지감자 종자가 들어 있는 배낭.남부터미널에서 오후 4시 45분에 출발하는 장항행 버스를 타고 서천터미널에 내렸다.

터미널역 앞에 있는 음식점에서 뼈해장국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내일 점심 1인분을 포장하였다

내일 아침꺼리 햄버거와 콜라 한 잔 우유 하나와 소보르빵 한개를 간식거리로 샀다 .시골은 어두워지면 왠만한 곳은 문을 닫고 거리에는 사람도 없다. 그야말로 저녁 8시면 한밤중이다 ~

문닫기 전 농기구 가게에서 삽과낫을 구입하고 배낭과 비닐봉지에 담긴 물건을 들고 메고 헤맨끝에 하룻밤 묵을 수 있는 방을 잡았다.다음날 아침 6시에 일어나 간밤에 사왔던 햄버거와 콜라로 아침을 때우고 터미날역에 손님을 태우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택시를 타고 텃밭이 있는 온동리에 내렸다

우왕 ! 보고싶었단다 나무들아 ~
한 달 전에 심었던 스물 여섯 그루의 나무들. 귀여운 꽃도 피우고 아무 탈없이 잘 자라고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 자두나무도 심었는데 언제쯤 따먹을 수 있을지~

외롭게 동떨어져 있는...... 감나무인 듯 하다. 암튼 감나무 주변 억새풀을 대충 제거하고 제초매트를 깔아줬다

저번에 해주지 못했던 나무들의 접목부위 비닐을 하나하나 다 제거해주고 (진작에 알았다면 심을때부터 해줬을텐데...) 접목부위을 감싼 비닐을 제거해주지 않으면 썩을 수도 있고 성장을 못한다고 인터넷에 나왔습니다....ㅋㅋ

 옆에 있던 철쭉꽃가지를 꺾어 땅속에 깊숙히 쑤~욱 꽃아도 보고 (그야말로 삽목은 꺾꽂이처럼 하나 꺾어서 땅에 꽂아 발근시키는 것이라 합니다. 대부분 나무들은 접목과 삽목을 이용하여 품질을 개량하고 우수한 품질의 나무를 생산한다 합니다 ) 삽목한 것이 4월말쯤에 와 봐살아 있으면 햐 그건 정말 저에게는 깜짝 놀랄 사건일 것입니다. 이렇게 가지하나를 꺾어 꽃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일인지 ...

마구마구 자란 찔레꽃 나무를 과감하게 잘라버리고 기존에 가지치기와 잘라내 널브러져 있던 잔재물들을 치우다보니 손목이고 발목이고 온몸이 다 아프고 그야말로 하늘이 노랗다 ~

간식타임 소브로 팥빵과 우유하나 ~

아무곳에나 심어도 잘 자란다는 돼지감자를 경사진 경계면에 심고 밭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잡은 몇 개의 보기 싫은 나무를 잘라냈다

간밤에 포장해서 가져온 뼈해장국. 뼈해장국은 하룻밤사이 변했는지 약간 쉰 냄새에 먹진 못했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고추와 김치만으로도 꿀맛이다

이쪽저쪽 왔다갔다 하면서 제초매트 50m를 까는데 혼자서 핀으로 고정시키려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4월말에 와서는 이곳에 무엇이라도 심을 생각으로 풀 안나게 덮는 거다

한여름도 아닌데 땀은 비오 듯 하고 대짜리 2개 사간 생수는 다 마시고 농사 힘들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정말 무지무지 힘들다 !

아침에 타고 들어온 택시기사님께 서울 올라갈때도 태워주십사 약속한 시간이 다가와 계획했던 일을 다 끝내지 못하고 다음으로 미뤄야만했다. 서천터미널에서 서울남부터미널행 막차로 서울에 도착하니 저녁 8시가 넘었다.

고향친구 먼 지랄났다구 이곳까지 내려와 쓸데 없는 짓 한다구 난리고 이해가 안된다는 집사람의 지청구부터 그 멀리까지 농사에 농짜도 모르는 미친짓이라는 엄니까지 ... 내편은 아무도 없다 .

사실
오가는데 몇 십만원씩 지출되는 경비와 시간을 이해득실로 따진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농사의 축에도 안끼겠지만 누가 시켜서는 못할 짓이다.
그저 내가 좋아서 한다는 거다.

훗날 멋진 귀농을 위해 지금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다른글도 보세요  

LIST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