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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묘

서삼릉에 묻힌 망자의 숫자로는 최대다. 후궁묘 외에도, 왕자, 공주의 묘 46기가 있다.  묘는 후궁과 왕자 ·공주묘로 구분돼 집장돼 있다. 가로 세로 반듯하게 정렬한 무덤군이 보기에 참 민망하다. 왕릉 경역내에는 후궁.왕자.공주의 묘를 쓸 수 없음에도 이렇게 많은 묘가 있다니 아이러니하지만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경술국치로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 11월 일본은 왕릉의 품격을 비하하고 훼손하기 위해 궁내성 소속으로 망조왕실을 관리하기 위해 이왕직(李王職)이 설치됐다.  이욍직에는 서울, 경기 일원에 산재한 후궁, 왕자, 공주 등의 분묘를 집장관리(集葬管理)한다는 명목아래 서삼릉 경역내 집장지가 선정됐다 .일제 때 숙종의 후궁인 소의 유씨의 묘 외 15기와 세종대왕의 1녀 정소공주묘 외 18기를 천묘 집장했다.8 ·15 광복 후에는 일제 때 옮기지 못한 후궁묘 중 묘역 주변 개발로 인해 존치가 어렵게 된 명종 후궁 경빈이씨묘 외 6기를 천묘했다 한다 .  

후궁묘 (비공개지역)

아름다운 길 서삼릉입구에 도착하니 비공개지역 효릉을 답사하고자 하는 몇 몇의 학생들과 관람객들이 있었다. 서삼릉 안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 효릉뿐 아니고 회묘. 태실,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았다. 그 중 후궁묘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아니지만 후궁묘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서삼릉 내의 비공개지역이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후궁은 참으로 슬픈 운명

후궁은 <간택후궁>과 <승은후궁>으로 구분된다. <간택후궁>의 경우 애당초 간택대상이 양반 사대부 가문이므로, 그 친정의 신분이 문제될 게 없다. 문제는 <승은후궁>의 경우다.  조선시대 궁녀들의 출신성분은 대다수가 천민 공노비였다. <승은궁녀>가 종4품 숙원 이상의 내명부 내관(후궁)에 오를 수 있는 기준은 바로 임신과 출산이다. 비록 후궁의 몸을 발어 태어났지만 왕비의 자녀라는 개념으로 후궁소생의 자녀를 다뤘고 후궁은 자신의 소생에게 존댓말과 함께 '어머니'의  호칭을 들을 수도 없고 들어서도 안 되는 신분이었다. 왕이 죽으면 왕비는 궁궐에 살 수 있지만 후궁은 궁 밖으로 나가서 살아야 한다. 승은을 입었지만 자식이 없으면 후궁의 첩지는 못받고 상궁이 된다.이런 상궁들은 왕이 죽으면 궐 밖으로 나가 비구니가 됐다고 합니다.이름도 한 번 못부르고 어머니라는 말도 못듣는 후궁들 정말 불쌍하고 가엾습니다...ㅠㅠ

만 후다닥 답사하면 될 줄 알았지만 효릉이 희릉.예릉과 함께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빠른걸음으로 10여분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고 가는 길에 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회묘,태실등 많은 비공개지역을 함께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찾아가는법  

전철 삼송역 5번출구로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041번 마을버스를 타고 - 10여분을 달려 삼송동 허브나라에서 내려 - 길건너 서삼릉

안내판 방향으로 약15분 쉬엄쉬엄 걸어가면 원당목장 경마교육원옆에 서삼릉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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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재위 1724~1776)의 둘째 아들로, 사후 왕으로 추존된 장조( 1735~1762, 사도세자)와 부인 헌경왕후() 홍씨를 합장한 무덤이다.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인 건릉()과 함께 1970526일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1762(영조38) 521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는 723일 배봉산() 아래 언덕에 예장되었으며묘호를 수은묘()라 하였다. 1776(정조 즉위) 3월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개칭하고, 존호도 사도()에서 장헌()으로 개칭하였다.1789(정조 13) 영우원은 다시 현융원()으로 바뀌었고, 같은 해 107일 현 위치로 이장되었다. 189911월 장종()으로 추존되고 무덤도 융릉()이라는 능호를 받았으며, 그해 12월에는 장종에서 장조()로 묘호가 다시 바뀌었다. 1762년 이른 봄. 세자로 책봉된 영조의 둘째 아들 선(사도세자)은 뒤주 속에 갇혔다. 스스로 자결할 것을 명한 영조의 뜻을 거역하자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둔 것이다.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던 선은  8일 만에 죽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것도 왕권을 물려받을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모략과 당파싸움으로 얼룩진 조선 구중궁궐의 암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융릉은 당파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아비로부터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묘다. 본래 경기도 양주군 배웅산에 있던 것을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면서 그 해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했다.정조는 생전에 하지 못한 효를 다하려는 마음으로 현릉원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야트막한 구릉은 숲을 우거지게 하고 온종일 볕이 드는 자리에 부모를 모셨다. 릉 주변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세웠고, 릉을 한 바퀴 두른 석축 또한 꽃문양이 화려한 조각으로 수놓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현릉원에서 오리 떨어진 곳에 절 하나를 지어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게 했으니 그게 바로 오늘의 용주사다.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죽어서 아버지 곁에 있기를 소망했고, 그의 유언대로 융릉 곁에 묻혔다. 그 두 개의 왕릉을 합쳐 융건릉, 혹은 화산릉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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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릉

조선 제5대 왕 문종( 1414~1452 재위 1450∼1452) 문종의 부인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1418~1441)의 무덤이다. 9개의 조선왕릉(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수릉·경릉)으로 이루어진 동구릉(, 사적 제193호) 경내에 있다.<국조오례>의 본이 된 영릉(,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의 형식을 따른 능으로,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동원이강릉()이다.정자각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의 능이 문종, 오른쪽 언덕의 능이 현덕왕후의 능으로 홍살문을 비롯하여 정자각·비각 등을 하나씩만 만들었다.
병풍석에는 이전 왕릉에 있던 방울·방패 무늬가 사라졌고 구름 무늬가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다. 상석을 받치는 고석()도 5개에서 4개로 줄었다. 묘역 가장 아랫단에는 머리·눈·코가 큼직하고, 장검을 두 손으로 짚고 선 무인석이 있고, 튀어나온 눈과 콧수염 등이 이국적인 문인석이 있다. 문종 이전 왕들의 능에는 신도비가 세워졌으나 문종 때부터는 신도비가 건립되지 않았다.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병을 얻어 1441년(세종 23) 문종보다 11년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안산의 소릉에 묻혔다. 단종 복위사건에 의해 1457년(세조 3) 추폐되었다가 1512년(중종 7) 복위되어 다음해 봄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으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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