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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릉(健陵)은 정조(正祖)와 비(妃)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 淸風)의 능(陵)으로 경기도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에 있다.조선 제22대 왕 정조( 1752~1800, 재위 1776~1800)와 부인 효의왕후() 김씨(1753~1821)를 합장한 무덤이다. 정조의 아버지로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장조 (祖, 사도세자)와 헌경왕후 홍씨의 합장묘인 융릉()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건릉은 봉분 안에 2실을 갖춘 합장릉이다. 정조는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휘는 산(祘), 자는 형운(亨運),호는 홍재(弘齋)다.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 (莊獻世子: 思悼世子)이고 ,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惠慶宮: 惠嬪) 홍씨(洪氏)이다. 1759년(영조 35)에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영조 38) 2월에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이 해 5월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1764년(영조 40)  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뒤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다.

인적이 드물어 뭔가 불쑥하고 나올것 같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솔밭길과 숲길 그렇게 긴 오솔길을 지나고 환하게 밝은 곳에 짜잔하고 화려한 왕릉이 보인다.

사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 선 왕 릉은 대부분 비슷하지만 우거진 나무들 속에 숨겨있는 보물 (세계문화유산)을 보기 위해 걷는 오솔길과 솔밭길의 아름다움은 백날 이야기 해봐야 직접 가보지 않고선 느끼지 못한다.



찾아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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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재위 1724~1776)의 둘째 아들로, 사후 왕으로 추존된 장조( 1735~1762, 사도세자)와 부인 헌경왕후() 홍씨를 합장한 무덤이다.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인 건릉()과 함께 1970526일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1762(영조38) 521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는 723일 배봉산() 아래 언덕에 예장되었으며묘호를 수은묘()라 하였다. 1776(정조 즉위) 3월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개칭하고, 존호도 사도()에서 장헌()으로 개칭하였다.1789(정조 13) 영우원은 다시 현융원()으로 바뀌었고, 같은 해 107일 현 위치로 이장되었다. 189911월 장종()으로 추존되고 무덤도 융릉()이라는 능호를 받았으며, 그해 12월에는 장종에서 장조()로 묘호가 다시 바뀌었다. 1762년 이른 봄. 세자로 책봉된 영조의 둘째 아들 선(사도세자)은 뒤주 속에 갇혔다. 스스로 자결할 것을 명한 영조의 뜻을 거역하자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둔 것이다.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던 선은  8일 만에 죽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것도 왕권을 물려받을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모략과 당파싸움으로 얼룩진 조선 구중궁궐의 암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융릉은 당파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아비로부터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묘다. 본래 경기도 양주군 배웅산에 있던 것을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면서 그 해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했다.정조는 생전에 하지 못한 효를 다하려는 마음으로 현릉원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야트막한 구릉은 숲을 우거지게 하고 온종일 볕이 드는 자리에 부모를 모셨다. 릉 주변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세웠고, 릉을 한 바퀴 두른 석축 또한 꽃문양이 화려한 조각으로 수놓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현릉원에서 오리 떨어진 곳에 절 하나를 지어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게 했으니 그게 바로 오늘의 용주사다.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죽어서 아버지 곁에 있기를 소망했고, 그의 유언대로 융릉 곁에 묻혔다. 그 두 개의 왕릉을 합쳐 융건릉, 혹은 화산릉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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