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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2대 왕 인종( 1515~1545, 재위 1544~1545)과 인종의 비 인성왕후() 박씨(1514~1577)의 무덤이다. 3개의 왕릉(희릉·효릉·예릉)과 후궁·대군·공주의 무덤들로 이루어진 서삼릉(西, 사적 제200) 경내에 있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곳에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효성이 지극했던 인종을 기려 능호도 효릉()으로 정해졌다.인종은 재위 8개월 만인 15457월 경복궁 청연루에서 숨을 거뒀다. 같은 해 1015 부모 옆에 묻어달라는 인종의 유언에 따라 부왕인 중종과 어머니 장경왕후의 능인 정릉() 옆에 능을 조성하였다. 하지만 1562(명종 17) 정릉이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의선릉() 옆으로 옮겨갔고, 장경왕후의 능은 희릉()이라는 능호로 바뀌어 효릉 옆에 있다.인종이 자신의 장사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명한 데다 당시 인종의 외가인 대윤()과 명종의 외가인 소윤()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명종과 문정왕후 측에서 상례절차를 줄이고 능역 조성을 소홀히 한 것으로 여겨진다. 1577(선조10)1129  인성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  왕비릉을 조성했을 때  왕릉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다른 석물들도 개수하였다.

비공개지역이므로 미리부터 예약해야 한다 지금은 어떨런지 모르지만 하여간 1주일전 서삼릉출장소에 전화로 예약하고 새벽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아름다운 길 서삼릉입구에 도착하니 비공개지역 효릉을 답사하고자 하는 몇 몇의 학생들과 관람객들이 있었다.서삼릉 안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효릉뿐만 아니고 태실,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았다.해설사의 자세한 안내로 2시간 넘게 조선왕릉의 아름다운 오솔길을 걸으며 선조님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찾아가는법

전철 삼송역 5번출구로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041번 마을버스를 타고 - 약 10여분을 달려 삼송동 허브나라에서 내려 -  길건너 서삼릉 안내판 방향으로 약 15분 쉬엄쉬엄 걸어가면 원당목장 경마교육원옆에 서삼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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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7대 왕 순종( 1874~1926)과 비 순명황후 민씨, 계비 순정황후 윤씨 세 사람을 합장한 무덤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과 함께 1970526일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다.순명효황후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광무 8) 115일 숨졌고, 이듬해 14일 양주 용마산 아래 언덕에 예장되었다. 1926425일 순종이 세상을 떠나 그해 611일 홍릉 왼쪽 산줄기 현 위치에 안장되면서 순명효황후를 이장하여 합장하였고, 1966년에는 순정효황후가 합장되었다.조선시대의 마지막 왕릉인 유릉()은 조선왕릉 중에서 하나의 봉분에 세 명을 합장한 유일한 동봉삼실릉()이다. 홍릉처럼 황체릉 양식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약간 작은 편이다. 봉분을 감싼 병풍석과 난간석에는 꽃무늬가 새겨졌으며 혼유석 망주석·사각.장명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대부분의 조선 왕릉에 설치된 석양()과 석호() 없다.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에는 정자각 대신 침전(殿)이 있고, 침전 앞 참도() 양쪽에 문인석·무인석과 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 등 동물 석상이 차례로 배치되었다. 침전 외에 비각.홍살문 수복방.재실 등의 부속건축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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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6대 왕 고종( 1852~1919)과 비 명성왕후 민씨(1851~1895)를 합장한 무덤이다. 순종과 순명황후,순정효황후의 무덤인 유릉()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다.1895년 8월 20일 경복궁 곤녕전에서 시해된 명성황후는 1897년 11월 21일 서울 청량리에 묻혔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숨져 3월 4일 현 위치에 예장되었고, 그때 명성황후의 능이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이장되어 고종의 능에 합장되었다.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홍릉은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성되었다. 꽃무늬를 새긴 12면의 병풍석으로 봉분을 둘렀으며, 봉분 밖으로 역시 꽃무늬를 새긴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혼유선,망주석,사각 장명등의 석물을 배치하였고, 봉분 밖으로 3면의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대부분의 조선 왕릉에 설치한 석양()과 석호()는 없다.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는 정자각 대신 정면 5칸·측면 4칸의 일자형 침전(殿)을 세웠다. 침전 앞의 참도() 양 옆으로 문인석·무인석과 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의 동물 석상을 차례로 배치하였으며, 장대한 크기의 문·무인석은 금관을 쓴 전통적 기법으로 조각되었다. 침전 외 부속건축물로 비각, 홍살문 수복방·재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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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3대 순조대왕(재위 1800∼1834)과 순원왕후 김씨(1789∼1857)의 무덤이다. 순조는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서 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에게 정치를 돌보게 됨으로써 외척에 의한 정치가 극에 달하였고, 사회가 혼란했다. 인릉은 무덤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고,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양석과 마석·상석·망주석을 세웠다. 문인석·무인석의 조각은 사실주의적으로 섬세하고 아름답다. 언덕 아래에는 2개의 비석을 세웠다. 순조는 18341113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숨을 거뒀다. 1835(헌종 1) 419일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인조 무덤장릉() 왼쪽 산줄기에 예장하였다가 풍수가 좋지 않다 하여 1856(철종 7) 1011일 현 위치로 옮겼다. 순원왕후는 185784일 창덕궁 양심각에서 숨져 그해 1217일 인조와 합장되었다 원래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재실은 무덤과 같은 지역에 있는데 헌릉·인릉의 재실은 서로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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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3대 왕 태종( 1367~1422, 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 민씨(1365∼1420)의 무덤으로, 인릉(;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무덤)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 194호로 지정되었다.1420년(세종 2) 7월 10일 창경궁 별전에서 원경왕후가 세상을 뜨자 태종의 명으로 같은 해 9월 17일 대모산 기슭에 왕후의 능을 조성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42년(세종 4) 태종이 승하하자 그해 9월 6일 세종이 어머니 원경왕후의 능 옆에 태종의 능을 조성하였다.헌릉은 두 개의 능이 같은 언덕에 조성된 쌍릉으로, 조선 태조의 건원릉 형식을 따랐다. 두 능은 12칸의 난간석을 둘러 서로 연결되어 있다. 봉분의 아랫부분은 병풍석이 감싸고, 능 앞의 석물은 망주석.혼유석.장명등 각 1쌍, 석호()·석양() 각 4쌍, 문인석.무인석·석마() 각 2쌍이 배치되었다. 이는 고려 공민왕릉(현릉)을 기본으로 삼은 배치법으로 , 조선왕릉의 위엄과 웅장함을 잘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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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1대 왕 영조(, 재위 1724~1776)의 맏아들로 사후 왕으로 추존된 진종( 1719~1728)과 부인 효순왕후 조씨의 무덤이다 3개의 조선왕릉(공릉·순릉·영릉)으로 이루어진 파주삼릉 (, 사적 제205)에 속해 있다.1728년(영조 4) 11월 16일 10살의 나이로 창경궁 진수당에서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의 무덤은 ‘효장묘’라 하였는데 1776년(정조 즉위) 왕(진종)으로 추존되면서 무덤도 영릉()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병풍석과 난간석은 설치되지 않았다. 각 봉분 앞에 상석 1좌씩 놓았고, 그 양측에 망주석 1쌍을 세웠으며, 봉분 주위에 석호()·석양() 각 2쌍을 교대로 배치하였다.봉분 아랫단에는 문인석,석마() 각 1쌍과 사각옥개형 장명석을 설치하였고, 무인석은 세우지 않았다. 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 정자각.비각.홍살문이 있다. 왕과 왕후로 추존되기 전 세자와 세자빈 무덤으로 조성되었을 때 설치한 모습 그대로이며, 추존 후에도 별도의 가설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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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 9대 왕 성종( 재위 1469∼1494)의 원비인 공혜왕후 한씨(1456∼1474)의 무덤이다.  공릉·순릉·영릉으로 이루어진 파주삼릉(, 사적 제205호) 경내에 있다. 공혜왕후는 1474년(성종 5) 4월 15일 왕비로 봉해진 지 5년 만에 창덕궁 구현전에서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6월 7일 현 위치에 안장되었다.봉분을 감싸고 있는 12칸의 난간석은 태조의 건원릉(), 태종의 헌릉() 난간석을 본떠 만든 것이다. 난간석 밖으로는 석양()과 석호() 각 2쌍이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봉분 앞으로 상석이 있고, 상석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있으며, 봉분 뒤쪽으로는 곡장(; 나지막한 담)이 설치되었다.봉분 아랫단에는 문인석 1쌍과 석마() 1쌍이 마주보고 서 있고, 중앙에 팔각 장명등이 있다. 가장 아랫단에는 무인석 1쌍과 석마 1쌍이 마주 서 있으며, 능원 아래에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이 있다. 비각에 보호된 비석은 1817년(순조 17) 9월 세운 것으로, 전면에 ‘조선국공혜왕후순릉’이라 새겨졌다.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을 뿐 조선 초기의 능제()와 비슷한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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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은 단릉으로 조성된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이다. 처음에는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역이 조영되었으나, 태조가 승하한 후, 원비의 태생인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덕왕후는 평민으로 강등되고, 현재의 위치로 천장되었다. 따라서 왕릉제인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봉분에서 사라지고, 4각 장명등, 고석, 상석 등만이 원래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장명등은 고려시대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 능역의 가장 오래된 석물인 동시에 예술적 가치가 높다.정릉의 공간은 일반 왕릉의 영역이 직선축을 이루는 데 비해, 자연 지형에 맞추어 절선축으로 조성되어 있다. 능역 입구 금천교의 모습은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조형기술을 볼 수 있으며 재실터 양 옆으로 서 있는 느티나무의 보호수도 살펴 볼만한 가치 있는 역사경관이다

역사탐방

극진히 사랑했던 현비가 갑자기 승하하자 태조는 도성 안인 현 덕수궁 뒤편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능역을 조성하고 강씨 봉분 우측에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마련하여 능호를 정릉으로 정하였다. 아울러 능의 동편에 흥천사(興天寺)라는 절을 지어 재궁으로 삼고 능침사찰로 하였다.그러나 잘 조성된 정릉은 신덕왕후의  왕자인  방번과 방석이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살해되고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의  다섯 번째 소생인 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 태종은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정하여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는 것을 허락하고,청계천 광통교(현재의 광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쓰게 하도록 하였다.  정릉이 있던 이 일대는 지금까지 정동(貞洞)으로 불리고 있다. 그로부터 260여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 신덕왕후는 현종에 의해 복권되면서 그 능이 현재와 같이 재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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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재위 1724~1776)의 둘째 아들로, 사후 왕으로 추존된 장조( 1735~1762, 사도세자)와 부인 헌경왕후() 홍씨를 합장한 무덤이다.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인 건릉()과 함께 1970526일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1762(영조38) 521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는 723일 배봉산() 아래 언덕에 예장되었으며묘호를 수은묘()라 하였다. 1776(정조 즉위) 3월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개칭하고, 존호도 사도()에서 장헌()으로 개칭하였다.1789(정조 13) 영우원은 다시 현융원()으로 바뀌었고, 같은 해 107일 현 위치로 이장되었다. 189911월 장종()으로 추존되고 무덤도 융릉()이라는 능호를 받았으며, 그해 12월에는 장종에서 장조()로 묘호가 다시 바뀌었다. 1762년 이른 봄. 세자로 책봉된 영조의 둘째 아들 선(사도세자)은 뒤주 속에 갇혔다. 스스로 자결할 것을 명한 영조의 뜻을 거역하자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둔 것이다.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던 선은  8일 만에 죽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것도 왕권을 물려받을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모략과 당파싸움으로 얼룩진 조선 구중궁궐의 암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융릉은 당파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아비로부터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묘다. 본래 경기도 양주군 배웅산에 있던 것을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면서 그 해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했다.정조는 생전에 하지 못한 효를 다하려는 마음으로 현릉원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야트막한 구릉은 숲을 우거지게 하고 온종일 볕이 드는 자리에 부모를 모셨다. 릉 주변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세웠고, 릉을 한 바퀴 두른 석축 또한 꽃문양이 화려한 조각으로 수놓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현릉원에서 오리 떨어진 곳에 절 하나를 지어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게 했으니 그게 바로 오늘의 용주사다.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죽어서 아버지 곁에 있기를 소망했고, 그의 유언대로 융릉 곁에 묻혔다. 그 두 개의 왕릉을 합쳐 융건릉, 혹은 화산릉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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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 [세종대왕] 

조선 제4대 왕 세종( 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 심씨(1395∼1446)를 합장한 무덤이다. 녕릉(; 효종과 인선왕후의 무덤)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었다.조선왕릉 중 최초로 하나의 봉분에 왕과 왕비를 합장한 능이자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를 따랐다. 1446년(세종 28)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죽자 당시 광주(,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서쪽 산줄기에 쌍실을 갖춘 능이 조성되었다.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이고, 서쪽 방은 세종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하여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세조 때 영릉의 터가 좋지 않다 하여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나왔고, 1469년(예종 1) 현 위치로 옮겼다. 옛 영릉에 있던 상석.장명등 망주석 ·신도비들은 그 자리에 묻었으나 1973년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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