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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원

사적 제200호인 서삼릉(西)안 서삼릉 정문에서 왼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현재 중앙여고 자리)에 있었으나 1949년 지금의 장소로 이장하였다. 봉분 주변에 장명등과 여러 석물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묘비의 비문은 영조가 직접 쓴 친필이다. 의소세손(1750~1752)은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듬해인 1751년 왕세손에 책봉되었으나 3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였다. 

효창원

조선 22대 왕 정조와 의빈 성씨()의 소생인  문효세자(, 1782~1786)는 5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원래 문효세자의 무덤은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효창공원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44년에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찾아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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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묘

서삼릉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 효릉뿐 아니고 회묘. 태실. 소경원. 왕자. 공주묘. 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다. 그중 회묘는 성종의 첫번째 계비지만 조선 최초로 후궁 출신 왕후가 된 여인이며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인수대비와 후궁들에게 미움을 사 결국 사약까지 받게된 인물이다.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40기중 하나는 아니지만 회묘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비공개지역이므로 소개합니다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의 서삼릉 경내에 있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1969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대학의료원 자리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한 것이다.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회릉으로 추숭하였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회묘로 강봉되고 신주는 묘 곁에 묻혔으며, 석물은 봉분과 함께 남아 있다가 서삼릉 내의 귀인()숙의()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기구한 삶을 살다간 폐비윤씨. 성종의 첫번째 계비지만 조선 최초로 후궁 출신 왕후가 된 여인이다.  [출처] 네이버 폐비윤씨의 수난 

일단 그녀의 나이 또한 유명한데 정확히 알려지진 않았으나 주변인물들로 유추해보면 성종보다 무려 12살이나 연상이다 .성종은 조선 역사상 최고로 많은 비와 많은 후궁을 둔 왕이다. 정치는 잘했으나 여색을 밝히는 왕이었으니 나이 많은 윤씨의 눈엔 질투심이 없다 하더라도 여자의 입장 그것도 중전의 입장에선 못마땅했을 것이다.윤씨는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무명을 짜서 직접 시장에 내다 팔아 어머니를 봉양할 정도로 가난한 사대부집이었다고 한다.그런 출신이 공신들이 판치던 세상에 원자를 회임했다고 낙하산급 인사가 단행됐으니 가만 있을 후궁들이 아니었다. 후궁들의 왕따 작전이 시작된다.내훈이란 책까지 편찬한 유교적 사상에 꽂혀 있는 인수대비가 시어머니다. 성종 역시 인수대비의 엄격함에 기를 못 펴고 살았다고 하는데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윤씨가 걸어야 할 길이 결코 녹록치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미천한 가문 출신의 윤씨를 인수대비는 가례 전부터 반대했었으니 고부간의 갈등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고 가문이 볼품없단 이유로 중전 자리에 대 놓고 도전하는 후궁들이 많았다.가장 중요한 건 윤씨의 투기인데 투기가 진짜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많은 기록에서 투기와 질투를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

그래서 중전에 앉은지 얼마안되어 후궁들의 모함이 본격 시작된다. 당시 품계로 그 유명한 엄숙의 정숙의가 중전의 투기를 이유로 대비전과 주상에게 계속 모함을 했고 심지어 곶감에 비상을 탔다는 등의 중상모략이 끊이질 않았다.  내명부의 훈계로 엄한 인수대비가 교태전에 직접 찾아가 투기와 예의가 없다는 이유로 회초리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당시 중전이었던 윤씨는 안팎으로 모진 수모를 당했다 .

기묘록에는 성종이 내시를 시켜 윤씨를 감시하게 했는데 대비가 이를 알고 내시에게 사주해 사실을 조작해 보고하게 끔 시켰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윤씨가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냈다고 하는데 성종실록엔 윤씨가 오히려 후궁방에 뛰어 들어 성종에게 뺨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어찌됐건 두 기록 모두 윤씨의 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성종의 품에서 멀어져 갔고 이미 성종의 눈 밖에 난 것은 물론 당시 삼전(정희왕후, 인수대비, 안순왕후)도 윤씨를 탐탁치 않게 여겼고 조정을 주름잡는 공신들의 눈밖에도 난 상태였다.그러기에 끝내 윤씨를 중전의 자리에서 폐위 하기에 이른다.

폐위후 폐비 윤씨는 사가에서 힘들게 살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를 염탐하던 조정에서도 원자의 생모인 만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공론이 제기됐으나 다시 한 번 인수대비와 후궁들이 공모해 성종에게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복위는 커녕 그녀를 사사하기에 이른다 .사사 전 원자(연산군)를 의식해 대비전은 주저했으나 아들이 왕위 되기 전 후환을 없애야 한다며 삼전합의를 이끌어 낸 한명회 정창손 등이 가세해 성종을 압박했고 성종 역시 직접 나서  폐비 문제에 종지부를 찍는다 . 성종 재위 10년 윤씨를 서인으로 폐하고 것도 모자라 좌승지 이세좌에게 사약을 내려 마을주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녀를 사사한다.

기묘록에 따르면 윤씨는 피눈물을 닦아 피로 얼룩진 수건을 어머니 신씨에게 전하면서 내 아이가 보위에 오르거든 나의 슬프고 원통한 사연을 알려 주오.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주시오. 라고 지금의 건원릉 옆에 안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렇게 폐비 윤씨는 사사되었고 그녀의 묘 또한 천장과 이장을 반복하다 끝내 이자리에 모셔졌다 .연산군 일기 1496년 3월 13일자엔 무덤을 발견한 연산은 묘가 허물어지고 구멍이 뚫려 여우와 살쾡이들이 시신을 먹어치웠을 것 같구나, 어찌 이리 무심할 수 있는가' 라고 애석함과 분통을 토로한 기록이 있는데 당시 묘의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회묘를 천장할 때 지관은 없었나 보다..... 단지 마땅히 이장할 자리가 없어 후궁묘역 좌측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능침공간은 그럴듯 하게 조성되었지만 무엇보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볕도 잘 들어오지 않아  매우 음산한 기운이 감돌아 음기가 강하다. 생전에도 편한 삶을 살지 못했고 천수도 누리지 못하고 사사된 것도 모자라 죽어서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우여곡절 끝에 자리를 잡았어도 편히 쉴 수 없으니 이보다 더 기구한 운명이 어디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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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후 태를 봉안하는 곳

왕실에서는 왕세자를 비롯하여 왕자, 세손, 궁주, 옹주가 태어나면 태(胎)를 석실(石室)에 담아 전국 길지(吉地)를 가려 봉안(奉安)하고 태봉(胎峰)이라 해 그 주변에서는 방목. 벌채. 개간을 금하였다. 태실 역시 집중관리라는 미명하에 태조의 태실 등 22기와 왕자 등 32기의 태실을 1930년대를  후하여 서삼릉 경역내로 이설했다. 일제강점기에 전국각지에 산해되어 있는 태실을 집중관리한다는 미명아래  국운을 쇄락시키고 민족정기를 말살시키려는 의도로 옮겨진 곳이다.서삼릉 경역내 묘 및 태실의 집장은 능역 일원을 공동묘역으로 변형케 해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비하 훼손하고자 한 일제의 의도적 책략이었다.

비석의 뒷면에는 태가 있던 곳의 위치와 날짜가 적혀있었는데 일본연호를 삭제한 흔적이 있다.

태실 (비공개지역) 

아름다운 길 서삼릉입구에 도착하니 비공개지역 효릉을 답사를 신청한 학생들과 관람객이 있었다.

서삼릉 안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 효릉뿐 아니고 회묘. 태실,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았다.

그 중 태실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아니지만  태실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서삼릉 내의 비공개지역이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종대왕의 태도 묻혀 있네요 ~

찾아가는법

전철 삼송역 5번출구로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041번 마을버스를 타고 10여분을 달려 삼송동 허브나라에서 내려 길건너 서삼릉 안내판 방향으로 약 15분 쉬엄쉬엄 걸어가면 원당목장 경마교육원옆에 서삼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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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공주묘

서삼릉에 묻힌 망자의 숫자로 최대다. 서삼릉 내에 후궁, 왕자, 공주의 묘 46기가 있다. 이중 희묘(禧墓)와 경선군묘(慶善君墓) 이외의 묘는 후궁과 왕자공주묘로 구분돼 집장(集葬)돼 있다. 가로 세로 반듯하게 정렬한 무덤군이 보기에 참 민망하다. 왕릉 경역내에는 후궁.왕자.공주의 묘를 쓸 수 없음에도 서삼릉에는 이렇게 많은 묘가 있다니 아이러니하지만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고 합니다. 경술국치로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 11월 일본은 왕릉의 품격을 비하하고 훼손키 위해 궁내성 소속으로 망조왕실(亡組王室)을 관리하기 위해 이왕직(李王職)이 설치됐다. 이왕직에서는 서울, 경기 일원에 산재한 후궁, 왕자,공주등의 분묘를 집장관리한다는 명목아래 서삼릉 경역내 집장지가 선정됐다. 일제때 숙종의 후궁인 소의 유씨의 묘외 15기와 세종대왕의 1녀 정소공주묘외 18기를 천묘 집장했다

8 ·15 광복 후에는 일제 때 옮기지 못한 후궁묘 중 묘역 주변 개발로 인해 존치가 어렵게 된 명종 후궁 경빈이씨묘 외 6기를 천묘했다.왕자묘로서는 고종의 1남 완화군묘를 천묘했다. 아직 서울 경기 일원에 묻혀 있는 일부와 서삼릉의 46기가 전부다. 이렇게 서삼릉 경역내 집장은 능역 일원을 공동묘역으로 변형시켜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비하 훼손한 일제의 의도적 책략이었다.

왕자.공주묘 (비공개지역)

아름다운 길 서삼릉입구에 도착하니 비공개지역 효릉을 답사하고자 하는 몇 몇의 학생들과 관람객들이 있었다. 서삼릉 안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 효릉뿐 아니고 회묘. 태실,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았다. 그 중 후궁묘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아니지만 왕자.공주묘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서삼릉 내의 비공개지역이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릉만 후다닥 답사하면 될 줄 알았지만 효릉이 희릉.예릉과 함께 붙어 있는 게 아니라 빠른 걸음으로 10여분을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고 가는 길에 소경원 왕자공주묘,후궁묘,회묘,태실등 많은 비공개지역을 함께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찾아가는법

전철 삼송역 5번출구로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041번 마을버스를 타고 - 약 10여분을 달려 삼송동 허브나라에서 내려 - 길건너 서삼릉 안내판 방향으로 약 15분 쉬엄쉬엄 걸어가면 원당목장 경마교육원옆에 서삼릉이 있다.          

여기서 잠깐 !  공주라는 말은 ?

주는 중국 진 · 한나라 때 비롯된 말이라고 하나,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이전부터 공주라는 말을 사용했다. 낙랑공주와 고구려의 온달에게 시집간 평강공주가 있으며 <삼국유사> 서동요의 주인공 선화공주도 있다. 제도적으로 공주라는 호칭은 고려 문종 때의 관제에 따르면 대장공주와 함께 정1품이었다. 그 뒤 공양왕 때 도평의사사의 건의에 따라 왕의 딸은 공주라고 불렸으나 조선 초기까지도 제도가 미비해 왕녀·궁주. 옹주 등 여러 가지로 불려 왕의 적설녀 외에 왕의 후궁도 공주라 칭했다. 그 후 조선에서는 왕의 정실이 낳은 딸을 '공주'라고 하고, 후궁이 낳은 딸을 '옹주'라고 해 구별했다. 공주는 지극히 존귀한 신분으로서 품계를 초월한 외명부다.

공주가  혼인하게 되면  모든 절차와 준비는  종부시(宗簿侍)에서  주관해 국법에 따라 예로써 치렀다. 공주의 남편은 종1품의 위(尉)인 광덕대부 숭덕대부로 의빈(儀賓)에 봉작됐으며 그에 준한 녹봉을 받았다.  의빈이 죽은 뒤에도 공주는 계속 쌀·콩·보리를 봄과 가을에 받았다. 공주가 낳은 아들은 처음 종7품, 사위는 2등급 낮은 종8품의 품계를 받고 그에 준한 대우를 받았다. 공주는 내명부 · 외명부와 함께 궁중의 잔치, 왕비의 시위 혼인 및 초상 등 여러 행사에 참석했다.  공주가 죽으면 국가에서는 왕녀의 상장제도에 따라 염빈. 예장. 조묘의 3도감을 설치하고 3일간 조회를 열지 않으며, 왕 이하 궁인들은 고기를 먹지 않는 등 정중한 예우를 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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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3대 왕 명종(재위 1545∼1567)과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다. 명종은 조선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로 1534(중종 29)에 태어났으며 1545(인종 1)에 왕위에 올랐는데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8년 동안 수렴청정하였고 1567년 경복궁 양심당에서 죽었다. 왕비 인순왕후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32(중종 27)에 태어나 1545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575(선조 8)창경궁 통명전에서 죽었다명종이 34세로 죽자 이곳을 능지로 삼아 치장하였으며, 능 관리를 위한 관원으로  .참봉 각 1명을 두었다.인순왕후 사후 왕비의 능도 왕의 능과 함께 나란히 앉혀 쌍릉을 이루었다.능제는 국조오례의식에 따랐고 왕릉과 왕비릉에 모두 구름무늬와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12면병풍석두르고 만석 중간에 12지를 새겨넣었다.또한 12칸의 난간석과 상석1,망주석1,양석 2,호석 2쌍과 3면의 곡장이 있다.한 단 아래에 문인석 1, 마석 1쌍과 가운데 명등석이 있고, 그 아래에는 무인석 1, 마석 1쌍이 있다.무덤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고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1호선 석계역에서 내려 버스1156번을 타고 버스정류장 태강릉 앞에 내렸더니 건너편에 태릉이 있었다.

매표소에서 비공개지역 예약하고 왔다 했더니만 이곳이 아니란다. ~

그럼 진작 예약할때 얘기해주지....다시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더 가 삼육대학에서 내림 삼육대학 정문 옆에 있다.

담벼락에 달린 조그만 입구가 열려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자 관람객이라곤 하나뿐인 나를 위해 관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맞춰 문열어 줄려고 파견나와 기다리는 관리인에게 미안한 생각에 오래 지체 할 수 없어 빠른걸음으로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찾아가는법

전철 석계역 6번출구 -  버스정류장에서 1156번를 타고- 태강릉 앞에서 내리지말고 비공개지역 강릉을 가야하므로 두 정거장 더 가 삼육대앞에서 내리면 길 건너 삼육대학 정문 옆에 강릉이 있습니다. 

* 예약 : 태릉관리소 : 0  2 - 9 7 2 - 0 3 7 0  

매주 요일.요일 / 1일  2회 : 9시 ~11시 .14~ 16시 . 최소 1일전에 예약하여 관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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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1대 왕 중종 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의 능이다
단경왕후는 1506년 반정으로 중종이 등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7일만에 폐출되었다.자식없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 무덤지역에 장례를 지냈으며 숙종 24년 (1698)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영조 15년(1739)에 무덤 이름을 온릉으로 봉하였으며, 무덤에 조각을 만드는데 있어서 장릉을 예로 삼되 죽은 후에 왕비의 무덤으로 봉해진 정릉이나 사릉을 따르게 하였다.  온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는 원형무덤으로 무덤 주위에 양석과 호석 1쌍을 배치하였다. 동물 모양의 조각을 반으로 줄인 것은 비릉(妃陵)으로 봉해진 무덤의 예에 따른 것이다. 무덤 아래에는 제사지내는 방(재실)이 있었으나 1970년 도로확장 때 없어졌다

찾아가는법

전철 구파발역 2번출구 - 360번 버스를 타고 신흥유원지내리면 - 길 건너 온릉현판이 보인다. 

답사방법

온릉은 서오릉관리소에서 관할하므로 서오릉관리소(02.359-0090.386-8139)전화로 비공개지역출입신청서를 메일로 받아 간절한 소망 담아 작성하여 FAX(02.359-0068)로 보낸후 기다리면 출입허가서를 메일로 받을 수 있다 (학문연구 목적이 아님 출입허용이 안되므로 구구절절하게 잘써 ) 출입허가서를 받으면 답사갈때 반드시 지참해야 하고 답사당일 온릉관리소(031.855-5228)에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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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2대 왕 인종( 1515~1545, 재위 1544~1545)과 인종의 비 인성왕후() 박씨(1514~1577)의 무덤이다. 3개의 왕릉(희릉·효릉·예릉)과 후궁·대군·공주의 무덤들로 이루어진 서삼릉(西, 사적 제200) 경내에 있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곳에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효성이 지극했던 인종을 기려 능호도 효릉()으로 정해졌다.인종은 재위 8개월 만인 15457월 경복궁 청연루에서 숨을 거뒀다. 같은 해 1015 부모 옆에 묻어달라는 인종의 유언에 따라 부왕인 중종과 어머니 장경왕후의 능인 정릉() 옆에 능을 조성하였다. 하지만 1562(명종 17) 정릉이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의선릉() 옆으로 옮겨갔고, 장경왕후의 능은 희릉()이라는 능호로 바뀌어 효릉 옆에 있다.인종이 자신의 장사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명한 데다 당시 인종의 외가인 대윤()과 명종의 외가인 소윤()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명종과 문정왕후 측에서 상례절차를 줄이고 능역 조성을 소홀히 한 것으로 여겨진다. 1577(선조10)1129  인성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  왕비릉을 조성했을 때  왕릉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다른 석물들도 개수하였다.

비공개지역이므로 미리부터 예약해야 한다 지금은 어떨런지 모르지만 하여간 1주일전 서삼릉출장소에 전화로 예약하고 새벽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아름다운 길 서삼릉입구에 도착하니 비공개지역 효릉을 답사하고자 하는 몇 몇의 학생들과 관람객들이 있었다.서삼릉 안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효릉뿐만 아니고 태실,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았다.해설사의 자세한 안내로 2시간 넘게 조선왕릉의 아름다운 오솔길을 걸으며 선조님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찾아가는법

전철 삼송역 5번출구로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041번 마을버스를 타고 - 약 10여분을 달려 삼송동 허브나라에서 내려 -  길건너 서삼릉 안내판 방향으로 약 15분 쉬엄쉬엄 걸어가면 원당목장 경마교육원옆에 서삼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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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7대 왕 순종( 1874~1926)과 비 순명황후 민씨, 계비 순정황후 윤씨 세 사람을 합장한 무덤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과 함께 1970526일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다.순명효황후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광무 8) 115일 숨졌고, 이듬해 14일 양주 용마산 아래 언덕에 예장되었다. 1926425일 순종이 세상을 떠나 그해 611일 홍릉 왼쪽 산줄기 현 위치에 안장되면서 순명효황후를 이장하여 합장하였고, 1966년에는 순정효황후가 합장되었다.조선시대의 마지막 왕릉인 유릉()은 조선왕릉 중에서 하나의 봉분에 세 명을 합장한 유일한 동봉삼실릉()이다. 홍릉처럼 황체릉 양식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약간 작은 편이다. 봉분을 감싼 병풍석과 난간석에는 꽃무늬가 새겨졌으며 혼유석 망주석·사각.장명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대부분의 조선 왕릉에 설치된 석양()과 석호() 없다.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에는 정자각 대신 침전(殿)이 있고, 침전 앞 참도() 양쪽에 문인석·무인석과 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 등 동물 석상이 차례로 배치되었다. 침전 외에 비각.홍살문 수복방.재실 등의 부속건축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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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6대 왕 고종( 1852~1919)과 비 명성왕후 민씨(1851~1895)를 합장한 무덤이다. 순종과 순명황후,순정효황후의 무덤인 유릉()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다.1895년 8월 20일 경복궁 곤녕전에서 시해된 명성황후는 1897년 11월 21일 서울 청량리에 묻혔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숨져 3월 4일 현 위치에 예장되었고, 그때 명성황후의 능이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이장되어 고종의 능에 합장되었다.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홍릉은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성되었다. 꽃무늬를 새긴 12면의 병풍석으로 봉분을 둘렀으며, 봉분 밖으로 역시 꽃무늬를 새긴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혼유선,망주석,사각 장명등의 석물을 배치하였고, 봉분 밖으로 3면의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대부분의 조선 왕릉에 설치한 석양()과 석호()는 없다.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는 정자각 대신 정면 5칸·측면 4칸의 일자형 침전(殿)을 세웠다. 침전 앞의 참도() 양 옆으로 문인석·무인석과 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의 동물 석상을 차례로 배치하였으며, 장대한 크기의 문·무인석은 금관을 쓴 전통적 기법으로 조각되었다. 침전 외 부속건축물로 비각, 홍살문 수복방·재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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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3대 순조대왕(재위 1800∼1834)과 순원왕후 김씨(1789∼1857)의 무덤이다. 순조는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서 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에게 정치를 돌보게 됨으로써 외척에 의한 정치가 극에 달하였고, 사회가 혼란했다. 인릉은 무덤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고,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양석과 마석·상석·망주석을 세웠다. 문인석·무인석의 조각은 사실주의적으로 섬세하고 아름답다. 언덕 아래에는 2개의 비석을 세웠다. 순조는 18341113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숨을 거뒀다. 1835(헌종 1) 419일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인조 무덤장릉() 왼쪽 산줄기에 예장하였다가 풍수가 좋지 않다 하여 1856(철종 7) 1011일 현 위치로 옮겼다. 순원왕후는 185784일 창덕궁 양심각에서 숨져 그해 1217일 인조와 합장되었다 원래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재실은 무덤과 같은 지역에 있는데 헌릉·인릉의 재실은 서로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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