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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묘

서삼릉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 효릉뿐 아니고 회묘. 태실. 소경원. 왕자. 공주묘. 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다. 그중 회묘는 성종의 첫번째 계비지만 조선 최초로 후궁 출신 왕후가 된 여인이며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인수대비와 후궁들에게 미움을 사 결국 사약까지 받게된 인물이다.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40기중 하나는 아니지만 회묘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비공개지역이므로 소개합니다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의 서삼릉 경내에 있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1969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대학의료원 자리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한 것이다.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회릉으로 추숭하였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회묘로 강봉되고 신주는 묘 곁에 묻혔으며, 석물은 봉분과 함께 남아 있다가 서삼릉 내의 귀인()숙의()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기구한 삶을 살다간 폐비윤씨. 성종의 첫번째 계비지만 조선 최초로 후궁 출신 왕후가 된 여인이다.  [출처] 네이버 폐비윤씨의 수난 

일단 그녀의 나이 또한 유명한데 정확히 알려지진 않았으나 주변인물들로 유추해보면 성종보다 무려 12살이나 연상이다 .성종은 조선 역사상 최고로 많은 비와 많은 후궁을 둔 왕이다. 정치는 잘했으나 여색을 밝히는 왕이었으니 나이 많은 윤씨의 눈엔 질투심이 없다 하더라도 여자의 입장 그것도 중전의 입장에선 못마땅했을 것이다.윤씨는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무명을 짜서 직접 시장에 내다 팔아 어머니를 봉양할 정도로 가난한 사대부집이었다고 한다.그런 출신이 공신들이 판치던 세상에 원자를 회임했다고 낙하산급 인사가 단행됐으니 가만 있을 후궁들이 아니었다. 후궁들의 왕따 작전이 시작된다.내훈이란 책까지 편찬한 유교적 사상에 꽂혀 있는 인수대비가 시어머니다. 성종 역시 인수대비의 엄격함에 기를 못 펴고 살았다고 하는데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윤씨가 걸어야 할 길이 결코 녹록치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미천한 가문 출신의 윤씨를 인수대비는 가례 전부터 반대했었으니 고부간의 갈등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고 가문이 볼품없단 이유로 중전 자리에 대 놓고 도전하는 후궁들이 많았다.가장 중요한 건 윤씨의 투기인데 투기가 진짜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많은 기록에서 투기와 질투를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

그래서 중전에 앉은지 얼마안되어 후궁들의 모함이 본격 시작된다. 당시 품계로 그 유명한 엄숙의 정숙의가 중전의 투기를 이유로 대비전과 주상에게 계속 모함을 했고 심지어 곶감에 비상을 탔다는 등의 중상모략이 끊이질 않았다.  내명부의 훈계로 엄한 인수대비가 교태전에 직접 찾아가 투기와 예의가 없다는 이유로 회초리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당시 중전이었던 윤씨는 안팎으로 모진 수모를 당했다 .

기묘록에는 성종이 내시를 시켜 윤씨를 감시하게 했는데 대비가 이를 알고 내시에게 사주해 사실을 조작해 보고하게 끔 시켰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윤씨가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냈다고 하는데 성종실록엔 윤씨가 오히려 후궁방에 뛰어 들어 성종에게 뺨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어찌됐건 두 기록 모두 윤씨의 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성종의 품에서 멀어져 갔고 이미 성종의 눈 밖에 난 것은 물론 당시 삼전(정희왕후, 인수대비, 안순왕후)도 윤씨를 탐탁치 않게 여겼고 조정을 주름잡는 공신들의 눈밖에도 난 상태였다.그러기에 끝내 윤씨를 중전의 자리에서 폐위 하기에 이른다.

폐위후 폐비 윤씨는 사가에서 힘들게 살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를 염탐하던 조정에서도 원자의 생모인 만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공론이 제기됐으나 다시 한 번 인수대비와 후궁들이 공모해 성종에게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복위는 커녕 그녀를 사사하기에 이른다 .사사 전 원자(연산군)를 의식해 대비전은 주저했으나 아들이 왕위 되기 전 후환을 없애야 한다며 삼전합의를 이끌어 낸 한명회 정창손 등이 가세해 성종을 압박했고 성종 역시 직접 나서  폐비 문제에 종지부를 찍는다 . 성종 재위 10년 윤씨를 서인으로 폐하고 것도 모자라 좌승지 이세좌에게 사약을 내려 마을주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녀를 사사한다.

기묘록에 따르면 윤씨는 피눈물을 닦아 피로 얼룩진 수건을 어머니 신씨에게 전하면서 내 아이가 보위에 오르거든 나의 슬프고 원통한 사연을 알려 주오.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주시오. 라고 지금의 건원릉 옆에 안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렇게 폐비 윤씨는 사사되었고 그녀의 묘 또한 천장과 이장을 반복하다 끝내 이자리에 모셔졌다 .연산군 일기 1496년 3월 13일자엔 무덤을 발견한 연산은 묘가 허물어지고 구멍이 뚫려 여우와 살쾡이들이 시신을 먹어치웠을 것 같구나, 어찌 이리 무심할 수 있는가' 라고 애석함과 분통을 토로한 기록이 있는데 당시 묘의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회묘를 천장할 때 지관은 없었나 보다..... 단지 마땅히 이장할 자리가 없어 후궁묘역 좌측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능침공간은 그럴듯 하게 조성되었지만 무엇보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볕도 잘 들어오지 않아  매우 음산한 기운이 감돌아 음기가 강하다. 생전에도 편한 삶을 살지 못했고 천수도 누리지 못하고 사사된 것도 모자라 죽어서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우여곡절 끝에 자리를 잡았어도 편히 쉴 수 없으니 이보다 더 기구한 운명이 어디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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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후 태를 봉안하는 곳

왕실에서는 왕세자를 비롯하여 왕자, 세손, 궁주, 옹주가 태어나면 태(胎)를 석실(石室)에 담아 전국 길지(吉地)를 가려 봉안(奉安)하고 태봉(胎峰)이라 해 그 주변에서는 방목. 벌채. 개간을 금하였다. 태실 역시 집중관리라는 미명하에 태조의 태실 등 22기와 왕자 등 32기의 태실을 1930년대를  후하여 서삼릉 경역내로 이설했다. 일제강점기에 전국각지에 산해되어 있는 태실을 집중관리한다는 미명아래  국운을 쇄락시키고 민족정기를 말살시키려는 의도로 옮겨진 곳이다.서삼릉 경역내 묘 및 태실의 집장은 능역 일원을 공동묘역으로 변형케 해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비하 훼손하고자 한 일제의 의도적 책략이었다.

비석의 뒷면에는 태가 있던 곳의 위치와 날짜가 적혀있었는데 일본연호를 삭제한 흔적이 있다.

태실 (비공개지역) 

아름다운 길 서삼릉입구에 도착하니 비공개지역 효릉을 답사를 신청한 학생들과 관람객이 있었다.

서삼릉 안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 효릉뿐 아니고 회묘. 태실,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았다.

그 중 태실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아니지만  태실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서삼릉 내의 비공개지역이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종대왕의 태도 묻혀 있네요 ~

찾아가는법

전철 삼송역 5번출구로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041번 마을버스를 타고 10여분을 달려 삼송동 허브나라에서 내려 길건너 서삼릉 안내판 방향으로 약 15분 쉬엄쉬엄 걸어가면 원당목장 경마교육원옆에 서삼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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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공주묘

서삼릉에 묻힌 망자의 숫자로 최대다. 서삼릉 내에 후궁, 왕자, 공주의 묘 46기가 있다. 이중 희묘(禧墓)와 경선군묘(慶善君墓) 이외의 묘는 후궁과 왕자공주묘로 구분돼 집장(集葬)돼 있다. 가로 세로 반듯하게 정렬한 무덤군이 보기에 참 민망하다. 왕릉 경역내에는 후궁.왕자.공주의 묘를 쓸 수 없음에도 서삼릉에는 이렇게 많은 묘가 있다니 아이러니하지만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고 합니다. 경술국치로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 11월 일본은 왕릉의 품격을 비하하고 훼손키 위해 궁내성 소속으로 망조왕실(亡組王室)을 관리하기 위해 이왕직(李王職)이 설치됐다. 이왕직에서는 서울, 경기 일원에 산재한 후궁, 왕자,공주등의 분묘를 집장관리한다는 명목아래 서삼릉 경역내 집장지가 선정됐다. 일제때 숙종의 후궁인 소의 유씨의 묘외 15기와 세종대왕의 1녀 정소공주묘외 18기를 천묘 집장했다

8 ·15 광복 후에는 일제 때 옮기지 못한 후궁묘 중 묘역 주변 개발로 인해 존치가 어렵게 된 명종 후궁 경빈이씨묘 외 6기를 천묘했다.왕자묘로서는 고종의 1남 완화군묘를 천묘했다. 아직 서울 경기 일원에 묻혀 있는 일부와 서삼릉의 46기가 전부다. 이렇게 서삼릉 경역내 집장은 능역 일원을 공동묘역으로 변형시켜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비하 훼손한 일제의 의도적 책략이었다.

왕자.공주묘 (비공개지역)

아름다운 길 서삼릉입구에 도착하니 비공개지역 효릉을 답사하고자 하는 몇 몇의 학생들과 관람객들이 있었다. 서삼릉 안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 효릉뿐 아니고 회묘. 태실,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았다. 그 중 후궁묘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아니지만 왕자.공주묘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서삼릉 내의 비공개지역이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릉만 후다닥 답사하면 될 줄 알았지만 효릉이 희릉.예릉과 함께 붙어 있는 게 아니라 빠른 걸음으로 10여분을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고 가는 길에 소경원 왕자공주묘,후궁묘,회묘,태실등 많은 비공개지역을 함께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찾아가는법

전철 삼송역 5번출구로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041번 마을버스를 타고 - 약 10여분을 달려 삼송동 허브나라에서 내려 - 길건너 서삼릉 안내판 방향으로 약 15분 쉬엄쉬엄 걸어가면 원당목장 경마교육원옆에 서삼릉이 있다.          

여기서 잠깐 !  공주라는 말은 ?

주는 중국 진 · 한나라 때 비롯된 말이라고 하나,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이전부터 공주라는 말을 사용했다. 낙랑공주와 고구려의 온달에게 시집간 평강공주가 있으며 <삼국유사> 서동요의 주인공 선화공주도 있다. 제도적으로 공주라는 호칭은 고려 문종 때의 관제에 따르면 대장공주와 함께 정1품이었다. 그 뒤 공양왕 때 도평의사사의 건의에 따라 왕의 딸은 공주라고 불렸으나 조선 초기까지도 제도가 미비해 왕녀·궁주. 옹주 등 여러 가지로 불려 왕의 적설녀 외에 왕의 후궁도 공주라 칭했다. 그 후 조선에서는 왕의 정실이 낳은 딸을 '공주'라고 하고, 후궁이 낳은 딸을 '옹주'라고 해 구별했다. 공주는 지극히 존귀한 신분으로서 품계를 초월한 외명부다.

공주가  혼인하게 되면  모든 절차와 준비는  종부시(宗簿侍)에서  주관해 국법에 따라 예로써 치렀다. 공주의 남편은 종1품의 위(尉)인 광덕대부 숭덕대부로 의빈(儀賓)에 봉작됐으며 그에 준한 녹봉을 받았다.  의빈이 죽은 뒤에도 공주는 계속 쌀·콩·보리를 봄과 가을에 받았다. 공주가 낳은 아들은 처음 종7품, 사위는 2등급 낮은 종8품의 품계를 받고 그에 준한 대우를 받았다. 공주는 내명부 · 외명부와 함께 궁중의 잔치, 왕비의 시위 혼인 및 초상 등 여러 행사에 참석했다.  공주가 죽으면 국가에서는 왕녀의 상장제도에 따라 염빈. 예장. 조묘의 3도감을 설치하고 3일간 조회를 열지 않으며, 왕 이하 궁인들은 고기를 먹지 않는 등 정중한 예우를 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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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묘

서삼릉에 묻힌 망자의 숫자로는 최대다. 후궁묘 외에도, 왕자, 공주의 묘 46기가 있다.  묘는 후궁과 왕자 ·공주묘로 구분돼 집장돼 있다. 가로 세로 반듯하게 정렬한 무덤군이 보기에 참 민망하다. 왕릉 경역내에는 후궁.왕자.공주의 묘를 쓸 수 없음에도 이렇게 많은 묘가 있다니 아이러니하지만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경술국치로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 11월 일본은 왕릉의 품격을 비하하고 훼손하기 위해 궁내성 소속으로 망조왕실을 관리하기 위해 이왕직(李王職)이 설치됐다.  이욍직에는 서울, 경기 일원에 산재한 후궁, 왕자, 공주 등의 분묘를 집장관리(集葬管理)한다는 명목아래 서삼릉 경역내 집장지가 선정됐다 .일제 때 숙종의 후궁인 소의 유씨의 묘 외 15기와 세종대왕의 1녀 정소공주묘 외 18기를 천묘 집장했다.8 ·15 광복 후에는 일제 때 옮기지 못한 후궁묘 중 묘역 주변 개발로 인해 존치가 어렵게 된 명종 후궁 경빈이씨묘 외 6기를 천묘했다 한다 .  

후궁묘 (비공개지역)

아름다운 길 서삼릉입구에 도착하니 비공개지역 효릉을 답사하고자 하는 몇 몇의 학생들과 관람객들이 있었다. 서삼릉 안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 효릉뿐 아니고 회묘. 태실,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았다. 그 중 후궁묘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아니지만 후궁묘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서삼릉 내의 비공개지역이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후궁은 참으로 슬픈 운명

후궁은 <간택후궁>과 <승은후궁>으로 구분된다. <간택후궁>의 경우 애당초 간택대상이 양반 사대부 가문이므로, 그 친정의 신분이 문제될 게 없다. 문제는 <승은후궁>의 경우다.  조선시대 궁녀들의 출신성분은 대다수가 천민 공노비였다. <승은궁녀>가 종4품 숙원 이상의 내명부 내관(후궁)에 오를 수 있는 기준은 바로 임신과 출산이다. 비록 후궁의 몸을 발어 태어났지만 왕비의 자녀라는 개념으로 후궁소생의 자녀를 다뤘고 후궁은 자신의 소생에게 존댓말과 함께 '어머니'의  호칭을 들을 수도 없고 들어서도 안 되는 신분이었다. 왕이 죽으면 왕비는 궁궐에 살 수 있지만 후궁은 궁 밖으로 나가서 살아야 한다. 승은을 입었지만 자식이 없으면 후궁의 첩지는 못받고 상궁이 된다.이런 상궁들은 왕이 죽으면 궐 밖으로 나가 비구니가 됐다고 합니다.이름도 한 번 못부르고 어머니라는 말도 못듣는 후궁들 정말 불쌍하고 가엾습니다...ㅠㅠ

만 후다닥 답사하면 될 줄 알았지만 효릉이 희릉.예릉과 함께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빠른걸음으로 10여분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고 가는 길에 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회묘,태실등 많은 비공개지역을 함께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찾아가는법  

전철 삼송역 5번출구로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041번 마을버스를 타고 - 10여분을 달려 삼송동 허브나라에서 내려 - 길건너 서삼릉

안내판 방향으로 약15분 쉬엄쉬엄 걸어가면 원당목장 경마교육원옆에 서삼릉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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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2대 왕 인종( 1515~1545, 재위 1544~1545)과 인종의 비 인성왕후() 박씨(1514~1577)의 무덤이다. 3개의 왕릉(희릉·효릉·예릉)과 후궁·대군·공주의 무덤들로 이루어진 서삼릉(西, 사적 제200) 경내에 있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곳에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효성이 지극했던 인종을 기려 능호도 효릉()으로 정해졌다.인종은 재위 8개월 만인 15457월 경복궁 청연루에서 숨을 거뒀다. 같은 해 1015 부모 옆에 묻어달라는 인종의 유언에 따라 부왕인 중종과 어머니 장경왕후의 능인 정릉() 옆에 능을 조성하였다. 하지만 1562(명종 17) 정릉이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의선릉() 옆으로 옮겨갔고, 장경왕후의 능은 희릉()이라는 능호로 바뀌어 효릉 옆에 있다.인종이 자신의 장사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명한 데다 당시 인종의 외가인 대윤()과 명종의 외가인 소윤()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명종과 문정왕후 측에서 상례절차를 줄이고 능역 조성을 소홀히 한 것으로 여겨진다. 1577(선조10)1129  인성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  왕비릉을 조성했을 때  왕릉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다른 석물들도 개수하였다.

비공개지역이므로 미리부터 예약해야 한다 지금은 어떨런지 모르지만 하여간 1주일전 서삼릉출장소에 전화로 예약하고 새벽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아름다운 길 서삼릉입구에 도착하니 비공개지역 효릉을 답사하고자 하는 몇 몇의 학생들과 관람객들이 있었다.서삼릉 안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효릉뿐만 아니고 태실,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았다.해설사의 자세한 안내로 2시간 넘게 조선왕릉의 아름다운 오솔길을 걸으며 선조님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찾아가는법

전철 삼송역 5번출구로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041번 마을버스를 타고 - 약 10여분을 달려 삼송동 허브나라에서 내려 -  길건너 서삼릉 안내판 방향으로 약 15분 쉬엄쉬엄 걸어가면 원당목장 경마교육원옆에 서삼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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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1대 왕 중종(  1488~1544, 재위 1506∼1544)의 무덤으로, 1970년 5월 26일 선릉(;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과 함께 사적 제199호로 지정되었다.  1545년(인종1)서삼릉(西경기도덕양구 원당동 산38-4) 능역에 있는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 오른쪽 언덕에 왕릉을 조성하고 능호를 정릉()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17년 후인  1562년(명종 17)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  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조선왕릉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면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정릉은 지세가 낮아 여름철 홍수 때면 재실과 홍살문이 침수되는 피해를 자주 입었으며 임진왜란때에는 선릉과 함께 왜구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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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5대 왕 철종( 1831~1863, 재위 1849~1863)과 철인왕후() 김씨(1837~1878)의 무덤이다

3개의 조선왕릉(희릉·효릉·예릉)과 후궁·대군·공주의 무덤으로 이루어진 서삼릉(西, 사적 제200호) 경내에 있다. 고종은 왕실의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예릉의 석물과 부속건축물을 웅장하게 조성하였다.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국조오례의 국조속오례의 국조상례보편에 의거한 능제를 적용한 마지막 능이다. 두 개의 봉분을 에워싸고 난간석을 설치하였으며, 난간석 기둥에는 방위를 나타내는 12간지 문자를 새겨 넣었다. 각 봉분 앞에 혼유석이 1좌씩 설치되었으며 망주석·석양()·석호()문인석.무인석·석마()장명등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왕릉은 상·중·하계의 3단으로 구성되고, 장명등은 중계의 중앙에 세우지만 특이하게도 예릉의 장명등은 하계 가장 끝에 서 있는데 이는 조선 왕릉에 있어 유일한 배치법이다. 장명등의 지붕 위에는 둥근 파문이 여러 겹으로 겹쳐 있고, 가운데의 원형 틀 안에 꽃문양을 새겨 넣어 전체적으로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에 있는 정자각은 다른 능의 정자각에 비해 웅장하고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길인 참도() 또한 기존의 2단이 아니라 3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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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llelujah !!

 

2009년 0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으로 시작된 조선왕릉 40기 

(총 42기중 2기 제릉.후릉은 북한소재) 답사는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전국 조선왕릉을 찾아 다녔지만

일주일이면 끝낼것 같았던 답사는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지고 한없는 게으름으로 만 3년이 걸려서야

2012년 03월 중순 비공개지역 파주장릉을 마지막으로 비로소 조선왕릉 40기

답사를 마칠 수 있었다.

순전히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발품팔아 몇 천장의 사진중에나름 좋은 컷을 골라

사진으로 보는 조선왕릉 40기완성하였다

 

인터넷 어디를 찾아봐도 

이렇게  조선왕릉  40기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은 없다고  자부한다

사실 자랑하고 싶다. 3년에 걸쳐 발품팔아 완성한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답사기록을 자랑하고 싶다.

또한 우리 문화유산을 사랑하고 관심있는 분들에게 조선왕릉의 환타스틱한

아름다움을 전하고자 합니다. 

파주삼릉 융릉 건릉 서삼릉 온릉 장릉 서오릉 정릉 의릉 선정릉 헌인릉 동구릉 홍유릉 사릉 광릉 태강릉 영월장릉과 후궁묘 서경원 왕자공주묘 태실 회묘 의령원 효창원 순창원 수경원 대빈묘 그리고

서울에 있는 4대궁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창덕궁의 환상적인 모습을 순차적으로

티스토리에 올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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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신들의 정원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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