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ALL

소경원 (비공개지역) 

아름다운 길 서삼릉입구에 도착하니 비공개지역 효릉을 답사하고자 하는 몇 몇의 학생들과 관람객들이 있었다. 서삼릉 안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효릉뿐만 아니고 태실,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까지 일반인들이 잘모르는 비공개지역이 많았다.그중 소경원은 청나라를 신봉한다고 하여 서인세력들에게 배척당하고 인조에 의해 독살된  비운의 왕자 소현세자의 묘라고 합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릉 40기중 하나는 아니지만 소경원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서삼릉 내의 비공개지역이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가슴 아픈 이름 소현세자 

이름은 왕(). 인조의 장자, 효종의 형이며,어머니는 한준겸의 딸 인열왕후다. 1625년 세자로 책봉되었고, 부인은 강석기의 딸인 민회빈강씨이고 보통 강빈이라고 부른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한후,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후 9년간 심양()의 세자관에 머물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동시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서  창구역할을  맡아 조선인 포로의 송환문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군량·선박 요구,각종 물화의 무역 요구등 정치·경제적 현안을 맡아 처리하였다. 또 청나라 인사들이 벌인 행사에 참여하고 청나라 황제의 사냥 등에도 동행하였다.
1640~1642년 인조의 병문안을 위해 잠시 귀국하였고,1644년 청나라 도르곤의 원정군을 따라 베이징에 들어갔다. 베이징에서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그로부터 서양 역법과 여러 가지 과학에 관련된 지식을 전수받고 천주교에 관해 소개받았다.

당시 베이징에서 명나라 멸망의 현실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인지 그는 청나라의 현실을 인정하고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원활히 하려고 애썼다. 이에 청나라의 경제적 요구를 들어주며 환심을 얻었는데,그들은 그를 ‘소군()’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세자관으로 들어가는 조선 정부의 재정부담이 커졌고, 동시에 부왕 인조의 의구심을 사게 되었다. 인조는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즉위시키고 자신을 몰아내려는 공작을 펴는 것으로 의심하고, 그를 감시하였다.소현세자는 베이징에 머문지 두어달이 지난 1644년 11월 26일 볼모에서 풀려났으며 1645년 2월 18일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그의 나이 34세였다  

소현세자 죽음은 일본의 개항보다 200년이나 앞설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잡혀갔던 동생 봉림대군에 비해 청나라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했고 새로운 문물에도 적극적이었다. 또한 조선에서 신봉하였던 성리학이 이미 낡은 사상이라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조에게는 청나라와 가까운 인물로 인식되었고 서인 세력들에게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결국 청나라에서의 행실을 문제삼아 인조의 냉대를 받았고 급기야 병을 얻어 급사하였다. 하지만 기록과 달리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설이 정설이다.  당시 조선의 정계에서 청나라를 배척하는 분위기와 인조의 불안을 염두에 두면 충분히 가능성 있으며 인조가 후궁 조씨와 김자점에게 시켜 소현세자를 독살한 것은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 진다. 인조실록에  의하면 소현세자의 주검은 까맣게 변해 있었고 7군데 혈에서 출혈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보통 사약을 마시고 사망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또한 세자가 사망하면 치료를 맡은 어의가 문책을 받게 되는데 인조는 오히려 그를 두둔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두 아들에 대한 인조의 평가는 극명하게 달랐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있던 동안의 고초를 인조에게 고하는데 봉림대군은 청 세조를 멸시했고 볼모로 잡혀간 조선인을 데리고 왔다고 고했다.하지만 소현세자는 청 세조는 도량이 넓은 군주이며 새로운 문물을 내보이며 그가 아끼던 벼루를 얻어 왔다고 고했다. 이에 인조는 그 벼루를 소현세자 얼굴에 집어 던졌다고도 전해진다.
소현세자가 죽은뒤 인조는 왕권강화 차원에서 세손(소현세자의 장자)을 폐위하고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책봉하였다.인조는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에게도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 역시 임금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씌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효종 때 두 아들은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효종은 살아남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을 석방하자고 건의하는 황해감사 김홍욱때려죽였다고 전한다. 이후 숙종 때 강빈의 옥사를 억울하게 여기고 소현세자와 함께 복위되었다. 19세기 말에는 그의 후손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일본의 개항보다 2백년이 앞선 것으로 조선이 세계정세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라는 평가받기도 한다.

 신들의 정원 다른 곳도 보세요

LIST

+ Recent posts